등록 : 2013.11.04 18:28 수정 : 2014.01.07 10:39

시작은 지난해 12월19일 대통령 선거 직후였다. 12월21일 한진중공업 노조 조직차장 최강서의 자살로 시작해, 그 다음날인 12월22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운남, 이어 한국외국어대 노조위원장 이호일, 그리고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윤주형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지난 7월15일 현대차 아산공장 비정규 노조지회 사무장 박정식이 죽었다. 한 명은 투신자살이고 나머지 모두는 노조 사무실 혹은 집에서 자살했다.

그들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최강서는 손해배상·가압류와 민주노조 파괴를, 이운남은 사내하청 해고자 출신 노동운동가로서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 부족을 한탄했다.

그리고 한국외국어대 노조위원장 이호일은 2006년 창조컨설팅까지 개입된 노조 파괴 속에서 심적 타격과 생계난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곪아오던 노동문제가 집약적으로 터져 노동자의 죽음을 불러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선거 국면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대와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배제된 자들인 노동자에 대한 제도정치의 외면이 결국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어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희망을 모아 함께 살자!’ 하던 노동자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희미한 화답이 노동자들의 희망을 절망으로 순식간에 바꾸어버렸다. 참담한 상황이다. 다음 선거를, 5년 뒤를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의 미약한 훈풍이라도, 여지라도 기대했던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정작 그 선거로부터 건질 것이 가장 적었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013년 ‘열사 정국’이 이전과 다른 점

이전의 ‘열사 정국’도 선거 국면에서 벌어졌다. 또한 노동운동 및 민주노조운동에 심각한 ‘전환기’였다. 1991년과 2003년, 그리고 이번의 2012~2013년.

1991년 5월6일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고서 13명의 죽음의 행렬. 양 김씨의 민중에 대한 배신 행위로, 단일화하지 못한 저들의 탐욕 탓으로, 부실한 민주주의 탓으로 결국 권위주의 세력이 체육관 선거로 당선시키려 했던 노태우씨가 직선제 대선의 첫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 정부는 1989년 1월2일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대한 신년 백골단 습격으로 노동자를 짓밟는 것을 신호탄으로 하여 이른바 공안 정국을 열었다. 그때 민주주의자들은 6월항쟁이 다시 시작돼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 ‘민주 쟁취,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1991년 5월의 그 싸움은 6월항쟁의 부활이라기보다 고작 그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낸, 옛 권위주의 세력을 다시 부활시킨 이른바 민주화 이후 정치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다. 1991년 봄 투쟁은 절망의 투쟁이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투쟁이었다. 앞이 막힌, 출구가 없는 투쟁은 그렇게 패배로 끝났다. 이후 암흑의 세월, 탄압의 세월이었다. 정파들은 다 무너졌고, 학생운동은 해체됐고, 노조운동은 급속히 우경화됐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이 집권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선·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그 대중적 ‘진보의 열망’ 정서를 업고 집권했다. 이른바 ‘개혁 정부’였다. 하지만 집권 뒤 그의 개혁적 색채는 딱 6개월도 못 갔다. 노태우 정부 때처럼, 결국 그 반동의 포문은 노동을 향해 먼저 불을 뿜었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김대중 정부가 한없이 열어준 비정규직 정리해고, 거기다 노조 탄압으로 노동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토끼몰이 인간사냥이었다. 이 땅의 리버럴들, 노무현 세력이 돼버린 이 땅의 386들은 모른 체했지만 그 정서, 그 절망의 정서는 결국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 행렬로 이어졌다. 1991년과 다른 점은, 이때는 모두가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농민들이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싸움, 노무현 정부의 전면적인 농업개방 정책에 맞서다 다시 죽임을 당했다. 거리에서 아예 경찰의 곤봉에 맞아 죽었다. 그렇게 옛 운동세력은 민중과 멀어졌다. 민중을 버렸다.

그리고 지금 2013년. 박근혜의 집권. 이번에도 노동자들이다. 이명박 정부 첫해의 광우병 반대 촛불은 어이없게도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씻어버리고,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세력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2009년 서울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77일 파업에 대한 야만적 학살극이 벌어졌다. 촛불은 침묵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초 동토의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한 여성노동자가 올랐다. 맞다, 그 한진중공업이다. 1991년 열사 정국의 도화선이 됐던,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있던 곳.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하에서 드디어 각성하기 시작했다. 나만 도태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야만의 생각, 나만이라도 정리해고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모르쇠한 채 벌어진 쌍용차의 학살극, 내 집 마련해 내 가계를 유지하고 내 자식들의 뒷배라도 봐주겠다는 그 부동산 열기가 부른 참사인 용산의 비극 앞에 서서히 각성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각성이, 그 기대가 오늘 절망의 원인이 돼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 부족했던 각성이, 그 모호했던 기대가 오늘 노동자들을 휘감고 있는 절망의 토양이 돼버렸다.

2012년과 2013년, 이번에도 열사 정국이라고 할 만하다. 매번 열사 정국은 선거 때, 정권의 전환기에 벌어졌다. 선거 때, 그리고 전환점이 될 선거 국면에서 열사 정국이 있었다. 또한 항상 노동자들이 그 열사 정국을 열어젖힌다. 이것이 현주소다, 한국의 현주소다. 결국 그런 것이다. 앞으로 5년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5년 뒤가 있는 사람들은 버텨낸다. 하지만 5년을 기약할 수도 없는, 5년 뒤라고 달라질 게 없는 사람들이 죽고자 한다. 죽음으로 그 절망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번은 앞의 것과 현저히 다른 점이 있었다. 적어도 1991년과 2003년은 투쟁 속에서 분신하고 자살하고 자결한 경우였다. 1991년은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는 제2의 6월항쟁-노동자 대투쟁과 결합된 급진적 민주주의를 향한 마지막 항거였다. 그리고 2003년은 노동에 대한 침탈과 노동조건의 악화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자기보존적 투쟁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번 2012년 죽음들은 말 그대로 절망이 빚어낸 죽음이다. 싸움의 전망 부재와 주체의 무력감과 절망, 그리고 자신들을 대표하지 못하는 정치체제와 노동 배제의 민주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노동의 절망을 대변하는 죽음이다.

노동의 희망이 거세된 대한민국

결국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절망이다. 한진중공업의 최강서를 죽음으로 내몬 것도,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 이운남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두 절망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은 쌍용차 정리해고 뒤 24명을 죽게 만들었다.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그 ‘절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들은 왜 그토록 절망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절망하게 하는가. 근데 이 답도 싱겁다. 사실 절망은 별게 아니다. 희망없음이 절망이다. 절망은 희망부재의 다른 말일 뿐이다.

희망이 없는 자본과의 싸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정치,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노동운동의 현재. 이 모두가 결합된 것이 그들의 ‘절망’이다. 그리고 그 절망이 그들에게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이는 고 최강서의 유서에서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2012. 12. 20 오후 7시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주십시오.

유서는 박근혜의 대선 승리와 박근혜 집권 5년간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유서는 또 싸움의 상대인 한진 자본의 적대성에 대해서, 그리고 노사 간 힘의 불균형에 대한 좌절을 표현하고 있다. 또 유서는 노조 탄압과 손해배상·가압류에 대한 그동안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158억원의 손해배상 금액. 마지막으로 유서는, ‘민주노조’ 내부의 해체와 붕괴, 이탈에 대한 심각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유서는 단지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이 유서에는 이 땅의 노동자들이 가진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현재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고 요구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직면하는 현실, 늘어지는 싸움과 자본의 비타협성,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급노조, 그리고 국가와 제도정치의 친자본적 성격이 다 언급돼 있다.

결국 이 절망은 노동자들이 공유하는 현실이다. 노동의 보편적인 잠재 현실이다. 그래서 심지어 이 절망을 예감하고 예상하는 노동자들은 그냥저냥 공장에 일터에 다니며 현장 권력관계에 그대로 굴복하고 만다. 다른 노동자들과 ‘산 자의 의자놀이’를 감행한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취한다. 장시간 노동과 힘든 노동강도를 감수하면서도 그 현장에 있고자 한다. 그리고 잠재적 현실은 싸움이 벌어지면 현실의 공포로 변한다. 그 싸움은 ‘장투(장기투쟁) 사업장’이 되기 일쑤다. 한국은 갈수록 파업 빈도는 줄어들지만 파업을 시작하면 장기파업 사례가 된다. 장투 사업장은 한국의 노동 현실을 대표하는 단어고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현실이다. 하나 이것은 노동자들이 비타협적이어서, 전투적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이 비타협적이고 국가가 자본 편에 일방적으로 서고, 한국 정치가 노동 배제적 민주주의에 의해 독점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배제 위에 선, 노동의 산업적 통합도 정치적 통합도 거대한 보수-자유 양당 독점적 정치구조이기 때문이다.

아닌가?

노동 대 시민의 대당 뛰어넘기

재작년 희망버스가 해고노동자 김진숙이 크레인 고공농성 중이던 부산 영도로 달려갈 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고무됐다. 드디어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 눈에 띄었고, 노동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시작됐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노동이 시민권을 회복한 것”으로 말했다. 혹은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표현들 역시 이미 한국 사회에서 뿌리 깊은 ‘노동 대 시민’의 대당에 기초하고 있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기각한다. 노동 대 시민의 대당이 문제인 것은 결국 그것이 노동을 시민(권) 밖에, 나아가 사회의 밖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당, 즉 노동 대 시민의 구도, 혹은 나아가 연대에 대해서도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는 도식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노동이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주어지는 고유한 권리인 시민권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인식했을 때, 노동 연대 역시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 혹은 노동의 사회적 연대로 불려질 수 있다.

우선 노동이 시민의 자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갖는 사회적 시민권을 인식하고 노동을 이 사회의 중심에 위치짓는 게 필요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희망버스의 시민적 연대를 통해 비로소 시민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로 이제야 선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시민적 권리,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권 혹은 노동의 시민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노동의 시민권은 노동계급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시민적 권리’(Civil Right)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시민적 권리의 보편성에서 유일하게 예외인 특수 권리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경제적 인구집단에, 그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권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시민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인정 속에서 자본에 대해 심대하게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부여되는 특수한 시민적 권리다. 흔히 노동삼권이라고 불리는 것, 즉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와 자본의 교섭권을 인정하며, 최종적으로 노동의 파업권을 긍정하는 경제적 권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참정권(투표권)과 노동조합의 정치적 활동의 권리 등 정치적 권리가 다른 한 축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노동의 시민권은 제대로 존중되지 못했다. 민주화 이행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기업 수준의 단체교섭권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방향으로 진전된 것을 제외하면 노조 결성에서 자본의 비협조와 탄압, 산별 중앙교섭 구조의 제도적 미비는 여전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파업권은 친자본적인 국가와 자본의 비타협성, 공권력과 자본의 사적 폭력 앞에서 억압됐을 뿐만 아니라, 돈의 압박 앞에서 무력했다. 물론 서구 민주주의라고 해서 처음부터 노동의 시민권이 확보된 것은 아니다. ‘시민’이라는 말이 구체제인 봉건사회에서 출현한 신흥 부르주아지만을 의미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노동자가 시민이 되는 과정이 서구에서도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사회의 구체제(앙시앵레짐)가 붕괴된 이후인 산업자본주의하에서 ‘시민’(부르주아지)만이 전유했던 ‘시민적’ 권리를 노동자에게로 확장하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 투쟁이었고 사회주의와의 결합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찰스 틸리나 에릭 홉스봄, 그리고 에드워드 톰슨 같은 역사사회학자들은 서구에서 노동자의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 홉스봄의 표현대로 하면, “전혀 부드럽지 않은 장기적”인 과정이 필요했다고 서술한다. 홉스봄이 말하는 ‘장기 19세기’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의 시민권이 지연된 것은 결국 민주화 이행으로 형성된 혹은 공고화된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행 과정부터 이행 뒤의 민주주의까지, 사회적·실체적 민주주의를 제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철저히 정치적 민주주의로 한정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제약됐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 노동과 시민의 간극은 서구에서처럼 좁혀지고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넓어지고 심지어 대립되는 것으로 돼버렸다. 이것의 반사적인 표현이 시민 대 노동 혹은 노동 대 시민의 대당이다. 그 대당에 기초한 언사는 설사 그것이 긍정적인, 나아가 친노동적인 담론일지라도, 노동을 시민의 밖으로 밀어내는 대당을 계속 공고화할 따름이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시민 대 대당의 이분법이고, 그를 넘어서서 노동에 주어지는 고유한 시민적 권리가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천착해야 한다.

노동의 사회적 연대

지금 필요한 것은 노동과 시민을 연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민된 권리를, 즉 파업권 등의 노동권을 긍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 역시 시민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아래로 향하는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자들의 상호 연대로, 사회적 연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희망버스를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고 한다면 여기서 노동은 누구이고 시민은 또 누구인가? 시민의 연대를 얻기 위해서, 노동은 또다시 시민 밖으로 외재화돼야 하는가? 아니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들은 노동을 외재화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탔던가? 아니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은 노동자인가, 시민인가?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노동 파괴’의 현실에 대해서 공분했고, 언제든 비정규직 정리해고의 대상일 수 있는 우리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싸우는 그들에게 연대한 것이다. 즉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이들 간의 고립적이지 않은, 즉 사회적 연대 방식이었다. 상호 연대였고 수평적인 연대였다.

그리고 사실 이는 파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관련된다. 즉,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긍정하는가의 시각과도 관련 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파업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파업의 사회화는 노동자들이 공장뿐 아니라 공장 밖의 세계와 걸쳐 있으므로 생활세계의 이슈들로, 공장 밖으로 손을 뻗어 연대하라는 의미로 곧잘 사용된다. 즉 ‘공장에서 생활정치로!’라거나 ‘공장에서 지역으로!’라는 구호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파업, 즉 파업의 사회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그 고유한 성격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공장 내에서 자리잡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사회적 이슈를 통해 자신의 설 자리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노동자는 공장과 일터, 사무실에서 노동하는 사람이다. 그의 생활 중 절대적 시간을 차지하는 그 공간에서의 노사관계, 그리고 노동하여 임금을 대가로 받아 생활하는 삶, 그것이 노동이다. 그들에게 노동문제가 아닌 어떤 사회적 이슈, 공공선을 위한 이슈에 자신을 투여하라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노동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노동은 이들 문제에 연대해야 하고, 그들의 이해를 위해 함께 싸울 수 있는 세력이 되어야 하지만, 이런 프레임은 결국 한국 사회의 노동문제, 나아가 파업에 대한 각성을 비껴가는 것이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싸움을 하던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6차례 최대 1만여 명이 부산 영도를 방문한 ‘희망버스’는 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국가권력의 비정상적인 자본 편들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들과 맞잡은 각계각층의 사회적 연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사회적 연대로 해소함으로써 노동의 희망을 만들 수 있음을 시사했다.

희망버스를 이어 우리 사회 노동의 고립을 타개하고 민주화 이행 뒤 민주주의가 배제해왔던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지 일회적인 혹은 사건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상시화하고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희망버스 이후 만들어진 ‘사회적파업연대기금’처럼 노동자들의 시민권, 특히 파업권이 손배·가압류 등 자본이 가하는 돈의 압박에 스러지지 않도록, 사회적 노력으로 파업연대기금을 조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동의 사회적 연대는 당장 파업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노동 배제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이중의 노동 억압 속에서, 그리고 노동 파괴가 일상화된 노동시장의 조건 속에서 모든 노동자, 우리들, 노동하는 우리들, 그리고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항상 잠재적인 공포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대항해서 나를 지지해줄 사회적 안전망이 될 것이다. 결국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연대’인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문화과학> 2012년 여름호에 쓴 ‘희망버스 이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흐름’을 일부 발췌했다.

알림 - 지난호 ‘나들 인문사회학’의 제목이 목차에서 ‘메이지에 물든 한국 학문의 담론’, 본문에서 ‘한국 학문 오염시킨 메이지 유산’으로 게재됐으나, 필자의 의도와 다르게 들어갔습니다. 필자가 보내준 제목은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이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권영숙 <한겨레> 기자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이어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노동사회학·역사사회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의 노동위원장을 지난해부터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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