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6:24 수정 : 2013.10.09 20:27

전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들여다보느니 창밖을 내다보는 편이 나은 계절, 볕은 학생 시절 집으로 일찍 돌아온 토요일 오후에 끓이는 라면 냄새처럼 여유롭다. 또한 평온한 일요일 오후처럼 어딘지 아쉽고 쓸쓸하다. 살다보면 그냥 받아들여야 해서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인연과 꿈과 마음이 많아진다. 새치와 같은 것들도 있다. 흰머리 한 가닥을 발견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냥 두었다가 문득 생각나 뽑으려고 찾아보는 날에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기억과 생활과 관계, 즉 삶에도 그런 부분들이 있다. 그래선지 1년 동안 저마다 결실을 맺고 마지막으로 몸을 치장하는 식물들의 모습을 목격해주며 서로를 위로해야 할 것 같은 날이 오는 모양이다.

유람지가 된 생활지

투명한 가을 햇살로 물든 서울 용산구 해방촌 오거리를 사람들이 여유롭게 오갔고, 초록색 마을버스는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이런 글을 시작할 때 반드시 삽입해야 할 것 같은 해방촌의 역사에 대해선 이미 이 연재의 5편째인 ‘종점수다방 황혜원 대표 남편 한석호’(<나·들> 2013년 3월호)에 전한 바 있다. 일단 그 역사를 갈음한 다음, 쇠락한 골목과 예쁜 카페에서 근사한 사진을 찍겠다거나,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는 목적만 없다면 골목길을 여유롭게 걷는 일이 방해받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 오거리에서 소월로20길을 따라 걷다보면 해방교회를 마주하게 된다. 1947년 20평짜리 천막 예배당으로 시작한 해방교회는 이후 기와집과 2층 건물을 거쳐 현재의 세련되고 웅장한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용산 일대엔 천주교인들의 순교지가 여럿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은 해방촌성당 전경.
누구든 한 번 이상은 늦잠 때문에 너무 급한 나머지 출근(또는 등교)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허둥대며 집을 뛰쳐나온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 하얀 선이 그어진 주차장을 코트 삼아 배드민턴을 치는 가족의 모습만큼 평화로운 풍경도 없다. 그건 마치 이삿날, 가구 밑에서 발견한 동전, 아니면 30cm 플라스틱 자로 우연히 꺼낸 테니스공 같은 것이다. ‘느리고 가볍게’의 가치를 찾는다면, 깜박이는 횡단보도의 파란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기술과 눈앞에서 버스와 전철을 태연하게 놓쳐주는 정도의 품위는 얻을 수 있다. 횡단보도도 없는 오거리를 마음대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가을볕은 고추 말리기 말고도 이렇게 잘하는 게 많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해방촌이 앞서 말한 목적, 그러니까 쇠락한 골목과 예쁜 카페에서 근사한 사진을 찍겠다거나,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는 목적으로 찾는 사람들로 꽤 붐비는 모양이다. 해방촌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는 것만으로 지금 이곳이 어떻게 소비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뜨는 곳, 카페와 레스토랑, 벽화, 먹을거리, 볼거리, 탐방, 데이트 코스…. 이런 단어가 등장하는 뉴스(news!)는 기실 서울에서 멋스럽다던 곳들이 앞서 걸었던 경로를 보여준다. 그 뒤에는 늘 이런 예비 뉴스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상업화, 임대료 상승, 재개발, 공동체 붕괴…. 심지어 어떤 기자들은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서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한 것처럼 꾸며 기사에 삽입하기도 한다. “제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그 가상의 행인들은 하나 마나 한 말들을 하고 사라진다.

괜찮은 장소나 경관이 소문을 타는 것을 서운해하는 심리에는 훼손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소유욕이 작동하기도 하지만, 생활지가 유람지가 되는 것과 그 이후를 익히 알고 있는 것은 좀 다른 경우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00원짜리 동전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500원짜리 지폐를 거북선과 함께 장식했다. 역시 지금은 볼 수 없는 5원짜리 동전도 거북선의 것이었으니 가히 이순신은 화폐통제사였다. 과연 이순신은 자신이 돈의 모델이 된 것에 기뻐할까?

곳곳에 붙어 있는 ‘해방촌 예술촌’이라는 팻말이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해방촌에 작가들이 자생하는 마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용산구와 계약을 통해 동네에 장식을 설치하는 사업이다. 물론 주민들도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하향식 사업의 측면이 없을 수 없다. 예쁘장한 그림 액자들이 걸려 있는 벽 아래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전쟁·순교 상처 안은 교회와 성당

해방촌 오거리에서 소월로20길을 따라 오르는 내내 높고 견고한 교회 탑이 방문자를 내려다보았다. 이태원 골목 곳곳을 내려다보는 이슬람성원의 탑처럼 말이다. ‘해방촌 빈가게’를 지나 마주한 해방예배당은 해방교회의 긴 역사가 무색하게 세련되고 웅장하다. 1947년 20평(66m²)짜리 천막 예배당으로 시작한 해방교회는 24평(79m²)짜리 기와집 예배당을 짓고 1949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해 3월에 부임한 허은 목사의 주도로 2층짜리 새 건물을 짓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허은 목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평안북도 월남인이 많아 선천군민회와 반공교회 그리고 서북청년회의 근거지였던 해방촌에는 우익이 많았다.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 허은 목사 역시 월남인이다. 서울로 유학하고 윤보선의 후원으로 일본대학교 종교학과와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는 1940년대에 주로 평안도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좌익과 손잡지 않다가 1948년 교회를 떠나 월남해 전라북도 고창읍교회를 담임한 후 해방교회로 오게 된 때는 1949년이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또다시 교인들을 버릴 수 없다며 해방교회를 지키다가 그해 7월25일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소각한 해방교회의 현재 모습은 안타까운 사연이 무색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해방교회 앞 골목을 지나칠 때 보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방언이 터지듯 자신만만했다. 여성들의 파도에 홀로 둘러싸이자 괜히 부끄러워지긴 했으나 시선을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 무려 24년 동안이나 함께해온 안경을 잃어버린 탓에 누군가와 눈이 맞아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방촌성당의 독특한 구조물은 금세 눈에 들어왔다.

다른 용산의 역사보다 덜 알려진 편이지만, 용산 일대는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왜고개 순교성지(용산구 용산동 5가), 새남처순교성지(용산구 이촌2동), 당고개 순교성지(용산구 신계동)가 모두 높은 언덕에 오르면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954년부터 그 복판에 자리한 해방촌성당은 신자의 주택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설립됐고, 1955년부터 성당의 신축과 증축이 이뤄졌다. 1983년에 지은 것이라는 현재의 성당은 겸손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마침 안뜰에는 눈부신 햇살이 숨어들었고, 보성여고와 등을 댄 담벼락에는 호박넝쿨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인간의 건축과 자연의 건축

눈 내린 사찰 마당에 서는 건 다도상 위에 놓인 차 앞에 차분히 앉는 것과 같다. 성당도 마찬가지여서 조각물과 스테인드글라스에 둘러싸이면 누구든 오래전부터 보관해온 경건함이 마음의 함을 열고 스며 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그런 신앙을 만든 근원에 관계한다. 조선(한국)의 옛 건축은 경관을 함께 보라 권한다. 자연과의 조화는 세계관의 반영이었고, 다시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 서구의 특징이 직선과 질서, 비례와 대칭이라는 통제된 아름다움이었다면 조선 건축의 특징은 곡선과 비대칭 속 균형에 있다. 물론 다 그렇진 않다. 그리고 그런 형식, 즉 그리스 조각의 완벽한 육체도 실은 정신의 강조였다.

중요한 것은 이런 표현차가 기술 격차 때문만은 아니란 점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와 기술의 진전에 따라 완성도가 강화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미술이 중세보다 세밀하듯, 도교의 영향을 받은 한나라보다 진나라 병마용이 사실적이다. 그리스·로마에 비견될 정도로 통일신라의 조각은 정교했고, 역시 이때의 불상이 고려 때보다 세밀하다. 바꾸어 말하면 후대에 덜 정교해지기도 했는데, 이는 못해서가 아니라 안 했기 때문이다(개별 미술가의 작품 경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딱따구리보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쪼아대는 굴착기 소리에 익숙해져 쉽게 지나치는 것이 주위에 많다. 새집은 나무와 함께 자란다. 나무가 성장하면서 점점 높아지는 이 경이로운 건축물은 아무리 높이 올라가더라도 고층 빌딩처럼 과시하지 않는다. 생면부지의 나그네들에게 집터를 내주는 나무 또한 제 몸집에 비해 작은 땅만 점유할 뿐이다. 그렇다고 까치와 상수리나무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까진 없다. 인간도 한때 땅에서 자란 것 같은 지붕 낮은 집에서 살았으니까. 버섯처럼 생긴 초가집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였고, 지반에 뿌리를 내리고 늙어갔다. “내 양말 빵꾸 났네”로 시작하는 동요에서 서글픈 정감을 느끼며 지금도 해진 옷과 헤어지기 싫어한다(그래서 같은 안경을 24년이나 쓰고 다닌 모양이다). 탈효율성을 위한 슬로시티마저 도구적 효율성에 봉사시키고, 경쟁과 교환가치에 둘러싸여 있다는 충고에 둘러싸여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엔 다른 생각의 건축관이 필요하다. 마음의 건축을 말함이다.

길동무가 된 탑들

대학로에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가 있던 자리, 그러니까 마로니에공원 주변의 건물들은 지금 문화정책을 위한 거점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던 유명한 중국요릿집은 자장면박물관이 되었다. 물론 자장면박물관에서는 자장면을 먹을 수 없다. 같은 장소의 같은 건물이 같은 듯 다른 의미저장소가 되는 것이 도시의 건축 역사다.

반면 군사기지와 달동네 그리고 전쟁을 겪은 해방촌에는 이렇다 할 근대 건축물 대신 교회와 성당이 표식이 되어준다. 하지만 해방촌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건축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오래된 군인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높은 빌딩도 없다. 그래서 해방촌은 탑의 마을일 수 있었다. 남산의 아파트들을 해체함으로써 도드라질 수 있었던 남산 N서울타워를 어디서든 볼 수 있고, 어느 골목에서든 해방교회와 해방촌성당의 탑을 볼 수 있다. 그중 비경은 신흥로25길 19번지 앞 골목 교차로에 있다. 이 자리에 서면 해방교회 십자가와 해방촌성당의 십자가를 양 갈래 골목길로 동시에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에 한참 서 있었다. 조금 자리를 벗어나니 작은 창문 안에서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와 어머니들의 수다 소리가 새어나왔다. 해방촌의 역사 한 토막 앞에서 역시 한참을 서성였다.

02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후암동 버스 종점으로 돌아와 108계단 앞에 서니 작은 건물의 2층 창문에서 음악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런 연락 없이 불쑥 다시 찾은 ‘종점수다방’에선 황혜원 대표가 공동체라디오를 체크하며 채록 중이었다. 동네에서 작은 탑을 쌓고 있는 그는 무례한 방문자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글·사진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및 장르분과장,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지난해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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