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6:11 수정 : 2013.10.09 20:22

한때 문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문화연대 등 문화예술 단체들은 2000년대 말부터 위기와 부침을 겪었다. 예술과 문화운동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문화다양성 보장의 시민사회적 역할이,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의 근거 없는 정치색에 의한 차별 지원과 통제 이후 크게 흔들렸다. 다른 한편으로, 재벌 계열형 문화자본의 시장 독점과 확장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문화자본은 문화예술 생태계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주류 이외의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창작 행위를 거세하거나 변방으로 몰아냈다. 지난 몇 년간 문화운동의 침체와 문화예술 시장의 독점화라는 구조적 악재들은 이렇듯 독립적 문화예술 기획과 창작의 싹을 거의 잘라냈다. 거대 문화자본의 자장 안에서 문화예술가들의 ‘독립’이 무색해지고 맥없어졌다.

대형 화랑 패권에 맞선 최초 예술협동조합

전미영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 이사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사무총장, 최초의 예술인 협동조합인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생을 달리한 민중예술 조각가 구본주와 마음으로 함께하며 현장 파견예술에 열심인 ‘삶을 조각하는 조각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구조적 조건을 깨치고 나와 당차게 자율적 흐름을 만들려는 문화예술가들이 차츰 눈에 띈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움직임은 문화자본 주변에서 장식용으로 거하는 무늬뿐인 독립이 아닌 그 자장 밖에서 자립을 꾀하려 한다. 새로운 사회적 대안경제 예술시장 안에서 어떻게 토착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예술적 가치를 확산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오늘날 그 흐름은 학술 혹은 지식 협동조합에서 시작해 사회적 기업 창업이나 문화예술인들 당사자 간 연대와 자립운동에 기반한 협동조합 결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지난 3월 설립된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이하 룰루랄라)은 이런 경향에서 결성된 예술가들의 제1호 협동조합이다. 비슷한 초창기 사례로는, 2011년 8월 결성한 인디밴드 기반의 ‘자립음악생산조합’이 있다. 사회적 기업이 주로 공적 자금 수혜 방식에 기댄다면, 문화예술가 협동조합은 문화예술 창작자의 자생적 생존 자립 측면에 좀더 주목한다. 2012년 제정된 협동조합기본법의 영향과 창작자들의 자생적 흐름 덕택에, 좀더 탄탄한 형태의 문화예술 활동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고 있다.

룰루랄라 또한 예술시장의 기형성과 독점화에 반기를 들면서 만들어졌다. 조합원 60여 명은 대형 화랑을 중심으로 한 미술시장의 패권과 독점에 맞서 또 다른 대안적 예술 생산, 유통, 소비 모델을 구상한다. 구성원들은 화가, 만화가, 조각가, 판화가, 시인, 평론가, 소설가 등 다양하다. 전미영, 신학철, 주재환, 전진경, 이철수, 이동수, 이하, 이윤엽, 나규환, 배인석, 김기호, 송경동 등 여러 세대군을 아우르는 작가들이 조합 운영에 핵심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각가 전미영이 룰루랄라의 현 이사장이다. 그는 현재 민예총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의 주요 질곡의 현장들, 예컨대 서울 용산 참사, 제주 강정마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투쟁 등에서 여러 작가들과 함께 ‘파견예술’을 펼쳤던 현실 개입의 작가이자 젊은 시절 작고한 구본주 조각가의 아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민예총에 있으면서, 그리고 현실 작가로서, 그 누구보다 대규모 화랑 시장이 주도하는 먹이사슬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협동조합 아이디어도 그렇게 그의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협동조합 형식을 빌려 점점 상업화돼가는 예술시장 현실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관이나 동료의 범위를 넘어서 조합원을 폭넓게 그리고 다양하게 구성했다. 전미영은 주류적 미학 논리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는 독립적인 창작 작업을 더 많은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데 룰루랄라의 중심 역할이 있다고 본다. 즉 룰루랄라를 통해 조합원들이 안정적으로 작가 활동을 수행하고, 신진 작가들의 데뷔 기회를 독려하는 동시에, 더 많은 대중이 작가들의 작업과 자유롭게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자 한다.

5 대 5에서 7 대 3으로… 먹고사니즘 보장

룰루랄라의 조합 가입 신청서는 이들의 조합 명칭만큼이나 재기발랄하다. 통장 디자인의 가입서 양식은 내가 뭔가 큰돈을 조합에 맡겼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룰루랄라 이사인 화가 배인석과 조각가 나규환의 작품이다. 룰루랄라가 발행한 통장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가입 신청서 글귀가 들어온다. “당신의 삶을 지지합니다. 작가 개인의 삶의 방식을 지지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전시와 기획으로 작가 개인의 개성이 유지되고 소통 가능한 환경 만들기를 시도합니다.” 룰루랄라의 문화예술 생산자 조합원들 각각의 자유로운 창작 보장에 대한 접근 시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미술시장에서 여러 형태로 화랑과 전속작가 등의 불공정 계약을 경험하며 창작 의욕을 잃고 스스로를 주변화하는 작가들의 모습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로 들린다.

자유로운 창작 보장과 함께 예술가들의 먹고사니즘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구체적 방식은 이렇다. 예를 들면, 룰루랄라는 작품 유통 수익 배분의 개혁을 꾀한다. 조합은 ‘전시와 기획을 통해 판매되는 작품의 수익은 작가 70%, 조합 30%의 구조로 배분한다’고 정했다. 보통 화랑을 통한 유통 독점 아래 작가가 작품을 판매하면, 화랑과 작가가 각각 50 대 50으로 수익을 나눈다. 기존 불평등 관행에 비하면 상당히 개선된 셈이다. 더불어 조합의 수익이 되는 30%조차 조합원 전체를 위해 재투자되거나 연말 배당금으로 각각 배분된다. 조합원 경제 이익 중심의 선순환 구조다. ‘예술은행’ 사업도 독창적이다. 조합원들의 창작물에 대한 유통 순환을 촉진하기 위해 공공기관이나 단체에 한해 6개월간 작품가의 30%로 임대해주고, 이후 작품을 돌려받거나 나머지 70% 금액을 지급하면 소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합원들의 작품 지명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은 결국 예술가들의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의 현 단계 위기와 한계상황에 대응한 대안적·자립적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조합을 단순히 비슷한 정서를 가진 예술가들이 모여 구상하는 이윤 추구의 경제행위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룰루랄라는 창작자 자신과 창작자-소비자 연합의 필요충족을 위한 다양한 동기와 실천의 종합으로 경제행위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그 안에서 각 조합원은 독립적 지위를 갖고 창작에 임하면서도, 조합 연대를 통해 각자가 지닌 표현적 가치를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게 조정하고 상호 협업하는 구조를 지닌다. 창작 생산자 조합원 확보 및 관리, 작가 활동 장려, 창작 워크숍·예술 교육, 소식지 발간, 전시 기획 및 홍보, 소비자 조합과의 연대 사업, 이익 배당 및 재투자 등이 서로 자연스레 연결돼 그들만의 건강한 예술 선순환 구조를 이룬다.

SNS 통한 ‘얼굴&페이스북 展’, 생산자-소비자 유대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 조합원들의 활동 모습들.
예술가들의 생산자 협동조합이다보니, 아직까지 주로 조합 작가들의 개인 혹은 단체 전시 기획과 홍보에 힘을 쏟아왔다. 예를 들어 지난 5월 조합 창립을 기념해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연 ‘멘붕 속에 핀 꽃’ 전시에서는 40여 명의 작품 100여 점을 전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최근 몇 달 동안 기획·전시한 ‘천호석-내가 좋아하는 것들2’ ‘신주욱-당신의 친구’ ‘비둘기, 박씨, 우렁이’전도 호평받았을 뿐 아니라 젊은 조합원들의 ‘영 아트 쿱’(Young Art Coop) 전시와 작가 워크숍 시리즈 등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룰루랄라가 구상 중인 더 큰 그림은, 생산자 협동조합에 머물지 않고 소비자와의 연대를 통해 생산자-소비자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을 추구하는 데서 발견된다.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자유에 기초한 개인들의 호혜적 상호성”이 어소시에이션의 요체라면, 문화예술 생산자-향유자이자 소비자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 룰루랄라 예술협동조합의 비전은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에 충실해 보인다.

예술 생산자-소비자 간 어소시에이션을 이루는 룰루랄라의 방식은 이렇다. 먼저 생산자 조합원 서로는 상호 위계와 구별을 넘어 동등한 집합적 예술 생산의 동료로 인정받는다. 더 나아가 작가 조합원은 스스로 창작의 자유를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잠재 관객이자 소비자의 새로운 예술 향유 방식에 조응하거나 함께하려는 예술 기획을 꾸미는 일에 참여한다. 작가-관객 간 작품 주문 제작과 소셜 웹을 통한 직거래, 작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무 강좌 및 조합 매체 발간 등이 이에 맞춘 사업들이다.

최근 ‘얼굴&페이스북 展’은 생산자와 소비자 연합의 미래상과 관련해 여러 긍정적 함의를 준다. 기획은 이렇다. 작품을 생산하는 조합 작가들이 페이스북이라는 매개 공간을 통해 소비자의 얼굴 그리기 신청을 받아 이를 완성한 뒤 전시한다. 전시에 앞서, 작가 조합원과 자신의 얼굴을 그려주길 원하는 일반 소비자가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상호 교류와 조정 과정을 거쳐 작품 주문 제작을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참여 작가들은 원하는 금액을 소비자와 함께 조정하거나 돈 대신 책 등 선물 형태로 상호 교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전시의 이벤트가 성사되면 화랑을 찾은 관객이 작품의 기획자, 오브제, 구입의 주체가 되는 것이니 적어도 홀대받는 ‘구경꾼’의 지위를 벗어난다. 별로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작가-관객이 교통하며 작품의 내용과 가격을 상호 결정하는 일종의 대중 참여형 전시 기획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전미영 이사장은 앞으로 더 많은 관객이 스스로 전시장을 찾아오게 하고 작가-관객의 상호 호혜적인 전시 기획을 구체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전시장을 통해 조합 작가들과 관객을 만나게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가와 대중 간 어소시에이션의 가치를 확산하는 문화예술 실험을 룰루랄라를 주축으로 다양하게 펼치길 고대한다.

글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교수. 뉴미디어와 인터넷 문화, SNS 문화까지 정보기술(IT) 현상 전반에 주목해 글을 써왔고, 최근에 예술행동 영역으로 확장 중이다. 저서로 <사이버 문화정치>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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