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5:34 수정 : 2013.10.07 15:34

나는 축구를 즐기지 않는다. 모든 스포츠에 심드렁하지만 특히 축구에는 관심이 없다. 싫어하진 않지만 딱히 재미를 모르겠다. 당연히 우리의 축구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이 공항에서 최강희 축구 감독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자랑했을 때도 내가 기대한 건 배우 최강희와 찍은 사진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국가대표팀의 경기, 특히 일본과의 시합이나 월드컵에는 관심이 있다. 2002년을 뜬눈으로 새웠고,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 응원에 나서기도 했다. 축구에는 관심이 없어도 다른 나라와 어떻게 시합하는지는 궁금하다. 가끔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기면 흐뭇하고 지면 아쉽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고 병역의무를 면제해주는 건 아직 납득할 수 없지만, 수고한 선수들이 충분히 칭찬받고 위로받고 보상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대표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 선수들을 모아 팀을 꾸리고 시합을 전개하는 감독의 자리는 또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기도 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을까.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국가대표팀 사령탑이던 홍명보 감독은 올림픽 첫 4강 진출에 동메달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올림픽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일본과의 준결승 경기에서 승리해 동메달을 딴 뒤 홍명보 감독을 헹가래 치는 모습.
어느 나라에서처럼 총 맞아 비명에 횡사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위태롭고 어려운 자리가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아마 2002년 월드컵 이후 그 자리는 더욱 위태롭고 어려운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감독이 휘스 히딩크에 비교돼 그의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잣대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일 월드컵으로 고조된 축구에 대한 관심은 축구계의 바람대로 K리그에 정착하지 못하고 월드컵 수준의 시합이 연일 벌어지는 유럽 프로리그로 옮아갔다. 월드컵으로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굳힌 기량 있는 한국 선수들 또한 대거 유럽으로 진출했다. 축구팬이라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유럽 리그로 한껏 높아진 안목과 기준으로 우리 축구를 평가한다. 이런 형편에서 국가대표 감독이라는 자리는 그 중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히딩크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행복하고 즐겁게 그 일을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시간을 보낸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히딩크를 포함해서 지금의 홍명보까지 9명의 감독(김호곤·박성화 2명의 감독대행 제외)이 있었지만, 임기를 채우고 자리를 떠난 감독은 히딩크, 딕 아드보카트, 허정무, 최강희 4명뿐이다.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된 감독이 움베르투 코엘류(명목상 사퇴), 조 본프레레, 조광래 3명이었고 핌 베어벡 감독은 자진 사퇴했다. 낭창한 가지 끝에 사람을 매달고 흔드는 상황,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자리는 그런 흔들림 속에서 일해야 하는 어렵고 힘든 자리다. 아무리 잘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핀잔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 외롭고 괴로운 자리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홍명보 감독이 계약 기간을 무사히 지탱할 확률은 정확히 50%다.

국가대표팀 감독 홍명보는 어떤 면에서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2002년 노란 완장을 차고 두 팔 벌려 그라운드를 내달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직감하고 있었다. 월드컵 4강 주역의 주장이 대표팀 감독이 된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져서 마치 그 앞의 모든 감독은 그가 경험치를 끌어올리고 레벨 업하는 동안 잠깐 그 자리를 맡아두고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물론 허정무 감독의 존재감은 그런 느낌을 불식할 만큼 컸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표정- 나쁘게 말해 무표정, 좋게 말해 침착함- 은 그를 어떤 풍파에도 변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킬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평소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필요할 때는 최전방 공격수로 나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공격형 수비수라는 자리는 그의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올림픽 첫 4강 진출에 동메달이라는, 지난 런던올림픽에서의 성과는 그 생각을 굳은 믿음으로 만들었다. 히딩크의 적자로 홍명보와 박지성을 꼽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한·일 월드컵의 신화를 다시 쓸 가장 유력한 후보다.

홍명보는 축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선수들을 잘 섞어 최적의 경기력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선수와 선수, 선수와 코치들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며 감독의 가장 큰 역할은 어느 선수에게도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권오상,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2009). 참으로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생각이다. 세상 모두가 바라는 리더십이기도 하다. 물론 충분한 에너지와 힘이 받침돼 모두가 믿고 따르며 흩어진 힘을 모아 대략 한 방향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경기 내내 상대 선수들을 조이고 압박해서 움직임을 차단하는 수비,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여는 공격이 홍명보가 생각하는 한국 축구라고 한다. 그리고 패스를 잘하고 부지런한 움직임을 보이는 선수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러한 홍명보식 축구 스타일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아쉬운 골 결정력이 지적되고 따라서 박주영의 거취에 대한 감독의 결단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어느 모로 보나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 같다. 일관성도 있고 원칙에 충실하기도 하다. 박주영이 군대 문제로 속을 썩일 때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기가 대신 가겠다 했고, 골잡이가 필요하니 대표팀에 넣으라 할 때도 소속팀에서 활약하지 못하는 선수를 대표로 선발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어긋나니 지금 상태로는 뽑지 않겠다고 했다.

기본 없이 전술에만 능한 사람들이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그런 사람들이 잠깐 빛을 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힘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전술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술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 전에 힘과 능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그건 제 실력이라 감히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장에 소용이 있는 전술과 다르게 힘과 능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부한 지적이지만 우리 축구의 문제는 힘과 능력을 기르는 일에 소홀하다는 점, 당장의 성과와 성적만으로 지도자와 팀을 평가한다는 점에 있다. 명백하고 결정적인 문제가 있거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과 자질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할 것이다. 홍명보에게 선임 감독들이 남겨준 50%의 확률은 또한 한국 축구가 성공할 가능성이 아닐까?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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