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5:17 수정 : 2014.06.13 13:34


2부를 시작하며

공자는 일생 동안 두 차례 외국 유랑을 했다. 54살 때 노나라 정치 개혁에 실패한 뒤 결행한 14년간의 망명은 아주 유명하다. 공자의 첫 유랑은 그의 나이 35살 때였다. 공자는 이 무렵 곡부에 있는 자신의 학당을 떠나 제나라로 간 뒤 몇 해를 외국에서 머물다 서기전 509년 43살 때 귀국했다. (출국 동기와 귀국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 유랑은 보기에 따라 망명일 수도 있고 유학일 수도 있었다.

공자의 청년 시절은 그의 어린 시절과 함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논어>와 사마천의 <사기>에 이때 일로 해석되는 일화들이 나오기는 하나, 후대 사건의 착오이거나 공자 사후에 생겨난 전승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당시 공자의 행적 대부분은 아직도 역사와 경전 속에 묻힌 채 눈 밝은 누군가의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史實)의 여백은 늘 후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공자가 훗날 이 무렵의 자신을 ‘삼십이립 사십이불혹’(三十而立 四十而不惑·‘위정’편 4장)이라고 정리했듯이, 공자가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자신을 완성해간 중요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30대라는 나이는 인생 행로의 많은 부분이 선택되고 결정되는 시기다. 30대의 공자에게는 이미 제자를 자처하는 동지들이 있었고, 속수지례(束脩之禮·육포 꾸러미 한 속을 들고 오는 예를 갖추어 배움을 청한다는 뜻. ‘술이’편 7장)를 갖추고 먼 길을 찾아오는 학생도 있었다. 비록 하대부(下大夫)의 낮은 벼슬조차 없는 신분이었으나, 적어도 학문과 인격 면에서 교사 공구(孔丘)의 명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공자는 그런 왕성한 연부역강(年富力强)의 시기에, 더욱이 이제 막 기반을 굳혀가고 있던 학당마저 버려두고 미래가 불확실한 유리표박(流離漂泊)의 험로를 선택했다. 왜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조국을 떠나야 했을까? 웅지를 품은 사람이 항용 그러하듯이 더 넓은 세계와 더 먼 미래에 대한 모색과 탐구의 열정이었을까? 젊은 개혁가로서 정치적 수세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망명의 길이었을까?

공자에게 이립(而立)은 분명히 어떤 성찰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입덕(立德), 입언(立言), 입신(立身)에 관한 구체적인 설정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불혹(而不惑)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숱한 회의와 좌절의 고비를 그가 돌파해냈음을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스스로 세운 뜻을 30대의 유랑 속에서 얻은 성찰과 실천을 통해 흔들림 없는 삶의 좌표로 확인하며 한 걸음씩 지천명(知天命)의 경지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사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자라는 사람도, 그의 사상도, 모두 그가 살던 시대의 산물이다. 공자는 자기 시대의 모순 속에서 자기 사상의 씨앗을 발현(發現)해 각고면려(刻苦勉勵)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통해 마침내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정신을 인류의 자산으로 남겼다.

때는 서기전 517년, 중국 주나라 제후 노소공 25년, 늦여름의 햇살이 곡부의 언덕을 뜨겁게 달구던 어느 날. 35살의 한 청년 교사가 바야흐로 자기 사상의 긴 여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보자.

이 기록은 나, 이생이 공자 일행을 따라 곡부로 돌아간 뒤, 공자 사후까지 생존한 몇몇 장로의 희미한 기억 속을 헤매고 다닌 결과이다. 결락된 사실(事實)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려다보니 부득이 많은 부분이 상상력에 의존하였다. 삼가 혜량하여주시길.


1. 공자, 신진학자로 명성이 높아지다

아침부터 곡부의 언덕엔 햇살이 눈부셨다. 공자는 자로와 여러 제자를 이끌고 양공의 묘당 안뜰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덥군.”

자로가 무심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씻었다. 공자는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체제(.祭)의 형식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다들 꼼꼼히 잘 살펴보도록.”

이날은 노나라 임금 소공(昭公)이 재위 25년을 맞아 아버지 양공(襄公)에게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공실(公室)의 큰 제사이니만큼 공자(公子)들과 가까운 종친은 물론, 문무백관이

대부분 참석했다.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공자는 체제의 현장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이 무렵 공자는 박학다식한 유자(儒者·의례 전문가)이자 소장학자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8년 전인 27살 무렵 담나라 임금 담자가 노나라를 방문했을 때다. 노나라의 원로이자 재상인 숙손소자는 담자가 고대 중국의 관제에 해박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환영연에서 물었다.

“우리 노나라 곡부는 원래 소호(小昊)씨(중국 전설상의 황제 중 한 사람. 동이(東夷)족의 조상으로 여겨진다)의 땅입니다. 소호씨가 천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새 이름으로 관직을 삼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이에 담자가 자신은 소호의 직계 후손이므로 당연히 잘 알고 있다면서 태고 시대의 조관(鳥官) 이름과 직무를 줄줄이 읊었다. 놀란 소공이 노나라 학자들에게 담자의 지식을 전수받도록 했는데, 그때 선발된 신진학자의 대표가 공자였다. 노나라는 주나라 창업의 주역인 주공(周公)의 봉국이 되기 전에는 은나라의 고유 문화를 간직한 곳이었다. 특히 곡부는 소호씨의 고향이어서 곡부 사람들은 주나라와 은나라의 문화를 융합시킨 데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소호씨의 사적에 그토록 뜨거운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은나라의 후예임을 자부하던 공자는 또 다른 의미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공자는 담자로부터 옛 관제에 대해 자세히 배운 뒤 이를 동료 유자들에게 전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듣건대 천자가 옛 관제를 잃으면 그에 관한 학문이 사방의 끝으로 흩어진다고 하였다.

사람이 반드시 알고자 한다면 어디에서든지 그 지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이제 나는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좌전> 소공 17년)

34살 무렵에는 교육자로서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당시 노나라 국정을 주무르고 있던 삼환(三桓)씨의 장손 집안인 맹손(孟孫)씨의 장로 맹희자가 죽음에 이르러 두 아들의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했던 것이다.(<좌전> 소공 7년·24년, <사기> ‘공자세가’) 이는 공자 교육의 탁월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과 적령기의 자제를 둔 수많은 부형들에게 뛰어난 교사로서 공자의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다.

2. 사가에서 추어진 천자의 춤

체제는 나라의 시조를 주신으로 모시고 역대 군주들을 배향하는 제사로서 본래 주왕실만이 행할 수 있었다. 제후국 중에서는 오직 노나라의 시조 주공(周公)의 제사만 유일하게 체제가 허용되었다. 주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으로 왕이나 다름없던 주공을 존숭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런 특별한 노나라의 체제를 참관하는 공자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주공의 제사에 국한되어야 할 체제가 언제부터인가 같은 주공의 후손이란 명분을 내세워 노나라 임금들도 행하고 있었다. 이는 천자와 제후의 차이를 무시한 것으로, 엄격히 따지면 제후가 왕의 권위를 넘보는 참람한 짓이었다. 예를 가르치는 의례 전문가로서 공자는 평소 이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이끌고 체제를 직접 참관하러 나온 것은 의례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더없이 좋은 학습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체제의 성대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순서는 만무(萬舞)를 봉헌하는 의식이었다. 만무는 오직 천자의 의례에서만 출 수 있는데, 종횡 8열씩 모두 64명의 무인들이 추는 춤이라 해서 팔일무(八佾舞)라 불렸다. 팔일무가 천자의 춤이라면, 그 아래인 제후는 36명이 6열로 추는 육일무가 허용되었고, 같은 방식으로 경대부는 사일무(16명), 일반 사족은 이일무(4명) 순이었다.

“원래 팔일무는 왕실에서만 출 수 있고, 제후의 나라는 육일무를 추는 것이 예법에 맞다. 그러나 우리 노나라는 저 위대한 주공의 나라로서 주공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 주공의 제사에 팔일무를 출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만약 우리 노나라가 주공의 공적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수 없게 된다면 마땅히 만무의 영예도 반납해야 할 것이다.”

공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제례가 드디어 만무를 올리는 순서에 이르렀다. 좨주인 소공의 얼굴에는 더위에 지친 짜증이 묻어났다. 다른 행사 같으면 시종들이 부채질이라도 해주겠건만 아버지 양공의 체제에서

부채질을 받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빨리 제사를 마무리짓고 싶은 소공은 만무를 속히 봉헌할 것을 제관들에게 재촉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제관들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만무 봉헌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도 등장하지 않던 악공과 무인들이 한참 뒤 묘당의 뜰에 도열했을 때 소공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일무를 추기 위해 나선 무인이 겨우 2명뿐이지 않은가! 64명이 8열로 도열하여 장관을

이루어야 할 만무에 무인이 단 2명이라니!

도제관이 소공에게 납작 엎드려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 간신히 소공에게 아뢰었다.

“악공과 무인들이 계손(季孫)씨 제사에 갔다고 합니….”

“무엇이 계환부(季桓府)에?”

소공은 기가 막히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아무리 계손이 국정을 농단하기로서니, 아무리 임금을 허수아비로 여긴다 해도, 이렇게

대놓고 과인을 능멸할 수 있단 말인가….”

3. 노나라 삼환의 성립과 전횡

이 어이없는 하극상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노나라의 정치 현실을 알아야 한다. 당시 중국은 왕보다 제후가, 제후보다 신하의 세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정도가 심한 나라가 노나라였다. 노나라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노환공의 아들들이 이룩한 세 가문인 삼환(三桓·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씨가 임금을 제치고 사실상 국가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삼환씨 중에서도 막내 가문인 계손씨가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다.

계손씨가 노나라 정권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게 된 계기는 공자가 태어나기 58년 전인 서기전 609년에 벌어진 권력다툼이었다. 대부 양중(공자 수)은 노문공이 죽자 서자 퇴(선공)를 옹립하기 위해 적자들을 죽이고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훗날 양중 세력은 선공의 정통성을 불신하며 자신들과 대립하는 삼환 세력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눈치챈 계문자(季文子)가 선제 기습을 가해 양중 세력을 패퇴시키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경쟁 세력이 사라지자 이번엔 삼환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였다. 실권자인 계문자가 둘째 집안인 숙손(叔孫)씨의 일원에게 암살당할 뻔한 일까지 벌어졌다. 선공에 이어 성공이 죽자 계문자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3살배기 어린 공자를 임금(양공)으로 세우고 계씨 정권을 수립했다. 계문자의 뒤를 이은 아들 계무자는 한발 더 나갔다.

“명실공히 계씨만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

계무자(季武子)는 2군(1군은 군사 1만2500명과 그 가솔들이 속한다)으로 편성된 노나라 군대를 3군으로 확대 재편해 삼환의 세 가문이 각각 1군을 지휘하게 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군대 지휘권의 효율적 행사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계손씨가 군권과 조세 수입의 3분의 1을 독차지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임금은 맹손, 숙손씨 가문과 함께 나머지 권한을 나눠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때 양공은 불과 14살이어서 이 조처를 막을 힘이 없었다. 집정이자 삼환의 장로인 숙손목자가 “도의에 맞지 않다”며 반대하자, 계평자는 “조상 앞에 삼환과 공실의 화목을 서약하겠다”며 맹세를 강요한 뒤 조처를 강행했다.(<좌전> 양공 11년)

계씨의 야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25년 뒤에는 군대를 다시 4군으로 나눠 2군을 계손씨가 차지하고, 나머지 1군씩을 맹손씨와 숙손씨가 각각 차지하도록 했다. 이 조처로 노나라의 병권은 물론 국가 조세 수입의 절반이 계손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는 사실상 국가권력이 계손씨 집안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의미하였다. 이때부터 노나라 공실은 삼환씨가 매년 제공하는 공물로 유지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의 조처를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팔일무를 자기 집 뜰에서 추게 한 계평자(季平子)였다. 계평자는 노나라 정권을 완전히 계씨하에 두기 위해 여러 조처를 강행한 노회한 정략가였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시씨 가문에게 군대 재편안을 발의케 한 다음 다시 유력한 호족인 장씨 가문으로 하여금 재편안을 관철하도록 공작을 꾸몄던 것이다.(<좌전> 소공 5년)

이때 공자의 나이가 15살이었다.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의 소년 가장이지만, 가슴속에는 학문의 큰 뜻을 품기 시작한(吾十有五而志于學. ‘위정’편 4장) 때다. 의지가 굳고 총명한 소년은 과연 이 정치적 대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4. 분노로 들끓는 궁정

계평자는 성정이 경박하고 탐욕스러웠다. 그는 할아버지 계무자가 다져놓은 기반 위에 자신의 권력을 강력하게 구축하고 나자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다.

“임금이 천자만 할 수 있는 팔일무를 추는데, 환공 할아버지의 같은 후손으로서 임금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우리가 조상 제사에 팔일무를 못 바칠 이유가 있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계씨가 팔일무를 바치려 한 제삿날이 공실의 체제와 겹치고 말았다. 계평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팔일무 봉헌을 강행했다. 임금과 계평자 사이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살피던 궁정의 악공과 무인들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현실을 좇아 묘당 대신 계환부로 몰려갔다. 그나마 끝까지 임금에 대한 예의를 지킨 무인은 2명뿐이었다.

넓은 묘당의 앞뜰에서 고작 2명이 너풀대며 추는 팔일무를 지켜보는 소공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옷소매 사이로 감춰진 두 주먹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소공의 곁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던 젊은 공자들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어쩔 줄 몰라 펄펄 뛰었다.

‘계평자, 이 찢어죽일 놈!’

소공의 큰아들로 후계 서열 1위인 공자 야(若)는 어금니를 깨물며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씨의 간자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것이다. 결코 이 치욕을 겉으로

드러내선 안 된다.’

그때 노나라 제일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장씨가의 종손인 장소백이 조용히 공자 야의

소매를 끌며 눈빛으로 말했다.

“공자님, 마침내 계평자가 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대부라면 누가 저런 참람한 짓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이는 계평자가 임금뿐 아니라 대부들까지 핫바지로 여기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심을 계씨에게서 공실로 되돌릴 절호의 기회입니다.”(<좌전> 소공 25년)

궁정의 악공과 무인들이 모두 계평자의 사가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공자도 경악했다. 공자는 파장이 되어 썰렁한 양공의 묘당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제자들은 공자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때 공자가 계평자의 행위를 단호하게 비판하며 말했다.

“사가의 뜰에서 천자의 춤을 추다니! 과연 누가 이런 짓을 인정하겠는가? 누가 이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편 1장)

스물여섯의 청년 자로가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맞장구를 쳤다.

“계손씨의 나라가 된 지 이미 오래라 해도 이건 너무하네요. 이럴 거면 차라리 임금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게 더 솔직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계씨가 100여 년 국정을 이끌고, 민심 또한 이를 당연시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원칙과 예법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올바른 지식인이라면 과연 누가 이것을 정상적인 나라라고 하겠는가? 또한 윗사람이 이를 용납한다면 어떻게 아랫사람들에게 예의도덕을 행하라 할 수 있는가?

공자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계속)

글 이인우 <한겨레>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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