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2:13 수정 : 2013.02.08 18:04

공자 / 위키커먼스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불원천 불우인 하학이상달 지아자 기천호)

 -<논어> ‘헌문’편 37장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사람을 탓하지 않았다.

 아래로 배워 위로 통달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늘은 이런 나를 알아주시겠지?

 프롤로그-상  

 1. 성인 또는 지인

 훗날 ‘위대한 성인(聖人), 공자’라고 불리게 될 사람 공구(孔丘)는 서력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479년에 죽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86년 추정)은 그때가 중국 주(周)나라 제후국인 노(魯)나라 양공 22년과 애공 16년 사이의 일이라고 기록했다. 유가(儒家)들이 편찬한 <공양전>과 <곡량전> 등에는 공자가 기원전 552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나, 이생은 사마천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의 노작을 따르려 한다.

 사마천은 공자 사후 약 388년 뒤에 완성한 <사기>에서 공자의 일생을 왕의 반열(<공자세가>(孔子世家))에 포함시켰다. 그는 이 전기에서 공자 사상의 위대성과 후세에 미친 영향을 총평한 뒤, 그를 ‘지극한 성인(至聖)’이라고 결론지었다.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한 사마천의 평가는 유가들을 더욱 고무시켰다. 이미 국학으로 떠받들고 있던 유교의 ‘현실적’ 추종자들은 조종(祖宗) 공자를 백성 중의 왕, 즉 소왕(素王)으로 치켜세웠다.

 공자께서 스스로 ‘미천한 출신’이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성인의 겸사일 뿐이다. 공자께서 일생을 통해 펼친 덕(德)은 웬만한 왕자가 받은 복(福)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후학들은 그렇게 자부했지만, 반(反)유가 대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없을 수 없었다. 그 자신 유가인 사마천이 공자를 세가에 포함시키고 나아가 성인으로 받든 것은 불편부당해야 할 사관의 자세가 아니라고.

 나 이생 또한 한때 그런 의문을 품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공자는 술을 즐겼고, 벼슬을 고대했으며, 노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간으로서 현실 속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죽은 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에 가까운 사람이거나, 왕이 되어 마땅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왜일까?

 

 2. 감동의 힘

 사마천은 고대 중국이 인류 문화에 남긴 가장 위대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 정신을 계승한 인물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 이웃 제나라에서 최저라는 실력자가 임금을 살해한 정변이 일어났다. 실력자는 그것이 명분 있는 쿠데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나라의 태사는

 ‘최저, 임금을 시해하다’

 라고 또박또박 기록했다. 최저는 고쳐 쓸 것을 요구했으나 태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실력자가 그를 죽이자, 직을 이어받은 동생(당시의 사관은 세습직이었다. 사마천 집안도 이런 전통에서 유래했을 것이다)이 또 썼다. ‘최저, 그 임금을 죽이다.’ 화가 날 대로 난 실력자는 동생마저 죽였다. 겁을 줘 굴복시키려는 짓이었지만, 또 직을 이어받은 막냇동생이 썼다. ‘최저, 그 임금을 죽이다.’ 실력자는 기가 질려 그제서야 살육을 멈췄다. 그때 제나라 남쪽 지방의 사관이 서울에서 정변이 일어나 중앙의 태사들이 잇따라 죽어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사(南史) 씨, 태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간을 들고 가다. 이미 썼다는 소식을 듣자 돌아가다.’

 중앙의 사관들이 죽임을 당하자 지방의 사관이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향한다. ‘나라의 기록을 지키는 직인으로서 사실의 엄중함을 보이리라.’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도중에 사관의 기록이 지켜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는 안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춘추좌씨전> 노양공 25년조에 기록돼 있는 내용이다.

 사마천은 장렬한 직업의식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국사(國史)의 직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일개 사인(士人)의 사업에 ‘성(聖)’이라는 극존의 수사를 바쳤다. 어쩌면 사마천은 적어도 공자의 전기를 쓰는 동안만큼은 사가로서 본연의 자세를 접어두기로 결심했는지 모른다. 훗날의 비평가들이 고증을 토대로 <공자세가> 를 “사실보다는 창작에 더 가깝다”고 혹평할 것을 각오하기라도 한 듯.

 공자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 이생은 사마천의 마음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죽기보다 더한 큰 치욕을 겪은 한 사내의 처절한 고독이 한 이상주의자의 절대 고독에 충격적으로 감전되는 경험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런 마음의 상태는 결코 합리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비논리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세계, 사실(事實)의 무혈성(無血性)을 초극해야만 진정한 사실에 도달할 수 있는 초인적 감동과 존경이 이 위대한 역사가의 흉금을 뒤흔든 것이 틀림없다.

 

 3. 벗이며 동지며 스승인 사람

 사마천이 공자를 성인이라고 말한 지 또 2천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비유교 문명권에서도 공자는 수세기 전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저명한 중국사가 중 한 사람인 미국 역사가 헬리 글래스너 크릴(1905~94)은 서구 세계에 공자의 진면목을 전한 명저 <공자: 인간과 신화>(1949)의 첫머리를 이렇게 쓰고 있다.

 “2500년 전 중국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일생처럼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도 없을 것이다.”

 사마천과 크릴이 시공과 문명의 차이를 초월해 공감한 것은 공자 사상의 시대를 초월한 진보성과 혁명성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성의 본질을 이해했으며,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최초의 사상가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공자는 인(仁)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논어> ‘안연’편 22장. 이하 <논어> 생략)

공자의 이런 교육적 언설은 후세의 많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혁명적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나, 이생이 본 공자는 희노애락을 아는 지극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완성된 인간’을 지향했다. 인간성의 완성, 즉 인(仁)을 추구했다. 해탈의 경지도 있음을 알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신을 공경하되 멀리한다”(‘옹야’편 20장)는 태도의 진정한 의미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공자는 금욕적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욕망을 완전히 지배하는, 즉 욕망을 거세하는 데서 경지를 구한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욕망을 이상의 실현을 위해 집중하는 방법에 대해 고뇌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내게 공자를 직접 관찰해본 사람으로서 공자의 됨됨이를 요약해달라면, 나는 “죄송하지만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너무 부족도 하지만, 공자라는 사람의 전체 상은 어떤 제자의 뜨거운 고백처럼 “내 앞에 우뚝 서 있어 따라가려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을”(‘자한’편 10장) 만큼 넓고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초한 수준에서 한마디해보라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공자의 일부분을 말할 수는 있다.

 “우리 선생님은 다만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늘 거기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헌문’편 26장)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선생님의 위대함이 흐르는 세월 속에 희미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뚜렷해지는 것은 그가 이 지상의 모든 ‘안타까운 사람들’에게 기꺼이 벗이자 동지이자 스승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 묘 / 위키커먼스
 

 4. 공자가 살던 시대

 공자가 살던 때는 어떤 시대였을까?

 기원전 5~6세기는 지구촌 곳곳에서 철학과 종교의 새 싹이 움트고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가 처음으로 ‘철학’(필로소피아·Philosophia)란 말을 사용하며 인문철학의 도래를 예고했다. 또 인도 문명권에서는 석가모니가 공자와 거의 동시대를 살며 종국에는 종교가 될 자신의 사상을 전파한 때였다.

 이때는 중국이 이른바 춘추시대의 말기에 해당한다. 목가적인 왕도의 시대가 끝나고 패권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크고 작은 수백여 개의 나라는 12개의 제후국으로 압축되었다. 판도 재구축의 과정이 약육강식이었음은 불문가지다. 격해진 패권 다툼은 훗날의 사가들이 전국시대라 부르는 시기의 서막이었다. 전쟁의 양상은 전차를 탄 귀족들 간의 맞대결에서 대부분 농부들인 병사들이 서로 죽여야 할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살육전으로 바뀌었다. 상대편의 전투 준비가 끝날 때를 기다려주던 시대에서 중상모략이 훌륭한 전략전술로 채택되는 시대로의 전환이었다. 치사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이기는 것이 장땡이고, 이긴 자가 정의를 결정하는 타락과 혼란의 시대 한복판에 공자라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가 서 있었던 것이다.

 기강이 한번 크게 흔들리자, 천하의 대권은 천명을 받았다는 주 왕실에서 힘센 제후에게 슬며시 넘어가고, 다시 그 제후의 유력한 가신의 손에 떨어졌다. 명분이 사라지자 하극상이 난무했다. 이번에는 가신의 가신, 즉 배신(陪臣)이 자신의 주군을 제치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귀족이 뭔 대수냐? 실력이 없으면 개뼈다귀일 뿐이지. 정치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궁전 깊숙이 처박혀 차려주는 밥상이나 잘 받으시라.”

 나라 사이에서는 먹고 먹히는 전쟁이 거듭되고, 나라 안에서는 시해와 역모의 결과에 따라 정의와 도덕이 오락가락했다. 천하라는 공물(共物)이 사물(私物)로 전락하고, 명분은 왕의 신하(諸候)의 신하(卿)의 신하(大夫와 士) 손으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개 밥그릇 같은 신세가 되었다.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어졌고”(‘자로’편 3장), 뜻 있는 사람들은 시절을 한탄하며 태초의 황금기를 그리워했다.

“임금 자리를 양보하던 아름다운 선양의 시대, 천명을 예와 덕으로 구현한 저 주공(周公)의 시대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이런 복고주의는 결코 공자만의 바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도한 이 세상을 예(禮)와 인(仁)으로 끊으리라. 천하에 도(道)가 있음을 내가 보여주리라.”

 두 주먹 불끈 쥐고 하늘을 우러러 천하 구제를 다짐하는 청년 공자에게 롤모델이 있었으니, 멀리는 제환공 시절의 관중부터 가까이는 동시대의 자산과 안영이었다. 촛불이 막 꺼져갈 무렵 잠시 반짝하듯이 암흑 시대의 서막에 나타난 여러 현자들은 공자의 삶과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인우 한겨레 기획위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iwlee21@hani.co.kr

李生自序 이생자서

나 이생(李生)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감사드린다.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본래 노(魯)나라 사람이 아니라 조선 남부에서 온 동이(東夷)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공자 사거 2400여 년 뒤에 태어났다. 어느 깊어가는 가을 밤 공원 그네에 앉아 불 꺼진 집들을 무연히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지금의 중국 땅이었다.

 이생은 졸지에 미지의 과거에 떨어져 낯선 공간을 유랑했다. 오로지 내가 왔던 시공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대륙을 헤매다가 천하를 주유하고 계시던 공자 일행과 조우하여 그 무리의 말단에 끼게 되었다. 이후 일행의 짐꾼으로 일하면서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얼마간의 동행이었을까. 나는 미래에서 막연히 알던 공자라는 사람과 그 제자들의 이상을 향한 열정,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교감했다. 그 순간의 경이로움이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뜻밖의 천운을 얻은 기쁨에 젖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조차 잊었다.

 만년에 고국에 돌아와 후학을 키우시던 공자께서 돌아가시고 3년상을 마친 제자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자기 나라와 고향으로 흩어졌다. 눈 밝은 몇몇 제자들은 훗날 <논어>(論語)라고 불리게 될 스승의 위대한 말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나 이생은 학교 마당을 쓸고 문도들의 신발 간수하는 일을 하던 어눌한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먼 미래에서 와서 한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목도하게 한 천명의 무거움을 피할 수 없어 내가 보고 들은 바를 감히 기록하려 한다. 부디 하늘의 도움으로 이 죽간들이 만고풍상을 견뎌내어 우리 선생님의 말씀과 뜻이 만세에 퍼지는 데 티끌만 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기 간절히 바란다.

 내 나이도 어느덧 이순(耳順)을 향하고 있으니 살아 있을 날이 많지 않다. 부디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딸들을 다시 보기를 소망하지만, 이뤄지지 않더라도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늘의 큰 보살핌이 있어 언젠가 내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먼저 아무 서점이나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서 나 이생이 전한 선생님의 흔적을 단 한 조각이라도 보게 된다면, 비록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흔쾌히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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