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2 13:25 수정 : 2013.11.11 14:21

민주당 의원들이 천막에 ‘세들어 사는’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광장 옆을 택 시 타고 지나갔다. 더운 여름 시원한 의원실 놔두고 저게 뭐하는 짓인지 싶어 혀 를 쯧쯧 찼더니, 기회를 노린 택시 기사가 말문을 연다.

“국정원에서 댓글 좀 달았다고 대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저게 대선 불복이지 뭡니까?”

“그러게요”라고 한마디 하자 택시 기사는 더 의기양양해서 자신의 지론을 폈다. 우리 경제가 어려운 이유는 민주당이 지난 일에 딴죽걸기 때문이다, 민주 당이 북방한계선(NLL)을 못 지키고 그걸 들키자 대화록도 없애지 않았는가, 민 주당은 없어져야 할 정당이다 등등. 택시 기사의 주옥 같은 말을 귓등으로 흘리 면서 생각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은 우리나라의 국기를 문란하게 하는 중대한 범죄일진대, 택시를 운전하는, 그러니까 결코 상류층이 아닐 택시 기사 는 기득권층을 주로 대변하는 새누리당을 도대체 왜 편드는 것일까? 비단 이 택 시 기사뿐만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서민까지 선거 때마다 새누리당에 표를 주지 않는가? 물론 10년의 민주당 집권 동안 서민의 삶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아무리 그래도 민주당이 쥐꼬리만큼은 더 낫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서민들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근원을 분석하던 중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 올랐다.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담임은 책상에 난 운동화 자국을 가리키며 “점심 시간에 책상 위를 밟고 다닌 학생 나와!”라고 했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담임은 화가 난 듯했다. 더 큰 목소리로 “지금 나오면 용서해준다”고 했지만, 결과는 마 찬가지다. 담임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범인이 나올 때까지 반 전체 아이들을 때 리겠다”고 하더니 한 명씩 칠판을 짚게 한 뒤 막대기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 다. 한 명이 맞으면 그다음 아이가 엉덩이를 내밀었고, 여학생도 예외는 아니었 다. 그렇게 60명이 몇 대씩 맞고 난 뒤에도 자수하는 아이가 없자 담임은 운동화 신은 학생만 나오라고 한 뒤 또 때렸다. 난 운동화를 신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 지만, 나랑 친한 친구가 운동화 신었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고 눈물 흘리는 걸 보 니 마음이 짠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 학생을 몇 번씩 때린 담임의 광기 어 린 폭력이 결국 끝났지만, 반 아이들의 마음은 범인에 대한 증오로 불타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 안 나오는 걸 보면 범인은 정말 나쁜 놈 아닌가?

며칠 뒤, 난 범인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K가 범인이래.” K는 자수한 게 아니라 책상 위를 밟고 다니는 걸 본 친구가 담임에게 일러, 취조 끝에 자백했 다는 거다. 나는 K에게 엄청난 강도의 징계가 따를 거라고 생각했다. 반 아이들 이 그 친구 때문에 매를 맞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 전혀 딴판으로 전개됐다. K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처럼 아주 즐 겁게 학교를 다녔고, 담임 역시 그 사건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난 그런 상황이 참 놀라웠다. 담임이 우리한테 해명하든지, 아니면 K 가 “애꿎은 너희를 매 맞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정도의 절차는 있어야 하 지 않았을까?

좀 치사하지만 나는 이런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K의 집은 그 동네의 잘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도 두드러질 만큼 부자고, 어머니는 육성회 간부로 학교에 많은 돈을 냈다. 그것이 사건 처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게 아 니겠느냐는 추측이다. 교실 책상의 운동화 자국을 보고 격분한 담임은 막상 범 인을 잡은 뒤 ‘아차’ 싶었을 거다. 초등학교 담임이 하나같이 날 미워한 데는 촌지 에 유난히 인색한 어머니 탓도 있던 것처럼, 그때 우리는 어린 나이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어느 정도 느꼈다. 이렇게 학교는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뭔지 가르 치고, 구성원이 거기에 복종하게 만드는 곳이다. 어릴 적부터 ‘가진 자가 잘살아 야 나라가 산다’고 세뇌당하다 보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처럼 불의한 일이 벌어 져도 너그러울 수 있다는 얘기다. 이건 물론 턱없는 상상이지만 우리 정부가 중 학교 과정까지 의무교육으로 못 박은 것은 국가 체제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려 는 음모일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 일명 미미 여사가 쓴 <솔로몬의 위증>은 학교에 대한 이런저 런 회의를 담아낸다. 한 학생의 자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무려 600쪽짜 리 세 권에 담아낸 이 책은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읽고 나면 그만큼의 울 림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자살한 학생은 정신세계가 다른 친구와 달라 왕따처 럼 지냈고, 죽기 전 몇 달간은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미미 여 사는 작중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관심도 없던 반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만 으로 난데없이 신성시된다. … 다함께 공통의 죄의식을 떠안는다. 그 죄의식이 구체적인 비난으로 닥쳐오지 않으리라고 밝혀지자 울면서 안도한다.”(1권 157쪽)

한 여학생은 자살 사건을 이용해 평소 싫어하는 친구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짓 고발장을 학교에 보낸다. 학교 쪽에서 이를 쉬쉬하다 어이없게 또 다른 학 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결국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진상 을 파헤치려 모의재판을 연다. 일주일간의 재판 과정을 그려낸 3권은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책 읽는 내내 “지금 천막에 들어가 있는 분들이 이 학생만 큼만 일을 잘 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탄식이 수없이 나왔다. 국정원 대 선개입 사건을 저지른 사람은 물론이고 은폐하려던 이들도 학창 시절 공부 잘했 으니, 학교란 어쩌면 이런 사람을 키우는 곳인지 모르겠다.

글 서민 수줍음이 너무 많아, 같은 사람을 다시 볼 때도 매번 처음 보듯 쭈뼛거린다. 하지만 1시간 이상 대화하다 보면 10년지기처럼 군다. 기생충학을 전공했고, 현재 단국대 의과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기생충의 변명>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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