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2 10:47 수정 : 2013.09.03 16:28

‘세대론’의 어떤 교과서적 지위를 획득한 <88만원 세대>가 나왔을 때, 그때만 하더라도 꽤 진격적인 활동가이며 동시에 20대이던 나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그 책 메인 카피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건 내가 토플책을 펴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뭐랄까. 난 그 구호의 모호함이 일종의 기만이자 사기적 언술처럼 느껴졌다. 무엇 하나 선명하지 않았다. ‘바리게이트’라고 하는 진지 구축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짱돌’이라고 하는 파괴로 돌진하자는 선동인지 일단 불분명했다. 게다가 거기에 슬며시 토플책을 연계해 그 세계의 대당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각인하는 방식은 지독할 정도로 기묘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식인 거인이 성벽을 파괴하면서 벌어지는 일상과 인간의 복수를 그린 은 만화·애니메이션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2014년 영화로 제작될 계획이다.한겨레 자료
토플책과 짱돌 사이에 놓여 있는 수많은 번뇌와 갈등 그리고 천연색에 가까운 생존 방법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에 비해 그 구호의 축약은 분명 지나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대부분의 세대론 논의는 이 구호를 비난하거나 넘어서려 하면서도, 동시에 혹은 어쩔 수 없이 이 구호의 세계관에 포박되는 우를 범했다. 극단과 극단을 충돌시키며 그 세대를 ‘희생자’로 상정하는 문법 속에서 우린 <88만원 세대> 이후 꽤 오래 그리고 지금껏 20대와 청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순간, 세상이 이 모양 이 지경인데도 20대가 바리게이트와 짱돌을 던지지 않는 데에 화를 내거나 혹은 20대가 바리게이트와 짱돌에 비견되는 무언가만 들고 나오면 아낌없이 ‘격려’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 엘런 예거가 있다. 물론 그는 아직 10대 소년이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채 100년의 역사뿐임을 감안하면 그는 연령적으로 충분히 그 세계의 ‘88만원 세대’이다. 또한 그 세계의 기성세대들은 엘런 예거의 세대에게 무언가를 보장해주거나 혹은 그들이 또 다른 100년을 살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분명 바리게이트 혹은 짱돌이 필요한 인류이다. 그 세계의 어른들은 그저 거대하다고 믿는 ‘방벽’을 쌓아올리고 외부적 개입의 피해를 최소화해 오늘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데에만 삶의 목적을 두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방벽일지라도 어찌되었건 당장의 안위를 보장해줄 수 있는 방책을 갖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 속에서 오늘도 어떤 어른들은 조세 저항을 정당화하며, 보편적 복지에 못 이기는 척 동의하면서도 내 주머니가 얄팍해지는 것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중적 존재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이간질이 발생한다. 기성세대의 ‘안위’에 포함된 젊은 세대들은 또 그럭저럭 살아간다. 하지만 엘런 예거처럼 아버지가 살해(!)된 이들은 철저하게 보호의 바깥으로 내버려지고, 오히려 체제 수호에 걸림돌이 되는 위협적 존재로 인지되고 만다. 엘런 예거는 말하자면 누구나 불행하지만 그 불행마저 위계화되어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진짜 불행한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인물이다. 그가 존재를 위협하는 거인에 대한 분노로 생의 의지를 다지며, 성 밖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기획하는 몇 안 되는 불손한 인물이 된 것은 분명 자유의지적 산물이지만, 그 의지는 부자유의 구조에 기인한 외부적 문제이다.

<진격의 거인>은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녀석들에게 지배당했던 공포를…새장 속에 갇혀 있던 굴욕을…’이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엘런 예거의 시점에서 이는 존재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총체적 저항이다. 안위를 보장해준다던 수성의 바리게이트는 이미 확실히 무너졌지만, 세상은 이미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 여기 주어진 것에 다시 적응하자고 주문한다. 그 굴욕에 타협할 만한 처지와 여유가 안 되는 엘런 예거는 ‘짱돌’의 확장성과 파괴력 없이는 한치도 삶의 문제를 진전시킬 수 없다는 세계관으로 진격한다. 진격은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이지만 그래서 불안하고 누군가에겐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 세계관 속에서 엘런 예거는 “평생 벽 안에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밥 먹고 잠만 자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마치, 가축 같잖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싸워, 이기면 살 수 있어… 이기지 못하면 죽어…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어…”라고 자신과 동료들을 설득한다. 엘런 예거에게 삶은 지배의 공포를 부수는 과정이고, 공포의 굴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벽 안에서 가축같이 사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싸우는 그 순간뿐이다. 그 싸움이 그의 삶이고, 그 싸움이 끝나면 그는 이미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바리게이트를 믿지 않으며, 기꺼이 ‘짱돌’이 되어 바리게이트 너머의 거인을 향해 돌진하던 이 소년은 스스로 거인이 된다. 싸움이 끝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서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거인이 된 이 소년의 기묘한 역설은, 거인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아직은 거인이 되는 것밖엔 없다는 앙상한 방법론을 드러내는 문제이기도 하다. 벌써 10여 년 전에,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누군가 충고했지만, 그건 지극히 낭만적이고 나약한 훈계였다. 사람에게 맞서기 위해선 괴물이 되어야 하고, 거인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거인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괴물을 부수기 위해 살아온 엘런 예거는 그래서 기꺼이 괴물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넌 사람이 아니다’라고 힐난하는 이들과 맞서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향한 엇갈리는 판단과 맞서며, 배신자와 영웅의 이중적 정체성에서 성 안과 밖의 경계선에서 존재를 증명해내야 하는 숙명과 싸워가며 엘런 예거는 진격한다. 이 과정에서 <진격의 거인>은 확실히 바리게이트와 짱돌의 세계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다. 그것을 막는 자가 아무리 강해도, 상관없다. 불꽃, 물이든 얼음 대지든 뭐든 좋다. 그것을 본 자는 이미 이 세계에서 최고의 자유를 손에 넣은자. 싸워!”라고 외치는 엘런 예거의 세계관이 그 투박함과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다양한 해석과 열광을 낳고 있는 것은 결국 어떤 분명한 선택만이 엘런 예거로 대변되는 세대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공포의 결박에서 헤어날 수 있으리란 심정적 동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은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그 용기만 가질 수 있다면 인간은 절대 무력하지 않다는 환기로 부족한 개연성을 채우며 나아간다.

바리게이트를 부정하며 스스로 짱돌이 되어 나아가려는 서사에 대한 광범위한 열광이 부박한 한국 사회에 던지고 있는 쟁점은 무엇인지, 찬찬히 그러나 분명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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