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6:36 수정 : 2013.09.02 13:50

1. ‘아는 만큼 보인다’ 사유의 규정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창비 펴냄)를 한번 훑어보지 않은 독자가 있을지 싶다. 나 역시 그가 출간한 시리즈 전체를 통독한 것은 아니지만, 몇몇 지역에 한해서는 자못 흥미롭 게 읽은 바 있다. 아마 그 책이 오늘도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던져준 가장 큰 통 찰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진술일 것이다. 이 진술을 대한 많은 사람은 그간의 여행이나 기 행을 돌아보며 감각적 반응의 단순성을 반성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제시하고 있 는 독법으로 문화유산을 관조하고 이해하려 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화하려는 몸짓을 펼치 기도 했을 것이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자 그 존재근거를 근원 적으로 되묻는 행위의 일종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시간과 장소와 접촉하게 될 때의 감각적 희열은 아마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물론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이 문화유산을 성실하게 답사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존재의 미를 심원하게 음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반대에 가까워서, 여러 형태의 답사와 기 행과 여행은 일상의 관성적인 무감각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공간이동’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속도로 위를 끝없이 이동하고 있는 산악회나 친목회의 관광버스는 꽉 짜 인 노동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보상하는 형태의 문화적 승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음량 좋은 스피커와 번쩍거리는 사이키 조명, 와이드 스크린이 내장된 관광버스는 사실상 길 위의 이동 식 노래방이자 주점이다. 시간과 장소와 공간이 일상의 노동시간에서 이탈한 듯 보이지만, 이 레저산업은 노동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면제의 시간조차 산업화하는 자본의 촘촘한 포위망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물론 나 역시 이런 버스에 몇 번 몸을 실은 적이 있다. 예민한 성격이 아님에도, 그 버스 안 에서 나는 ‘침묵’을 앗아가거나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체제의 근본적 메커니즘 중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제정신을 차리지 말라고 혼을 빼버리는 것이다. 기 술자본주의가 범한 가장 극악한 범죄는 우리에게 ‘고요’를 압수했다는 점에 있다. 소설가 장정일이 한 산문에서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듯, 조용하게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탄 택시 안에서 도, 우리는 자신의 기호와 아무런 관련 없는 음악을 듣고, 정치적 당파를 밝힐 것을 요구받으 며, 무례한 반말 역시 종종 경험해야 한다. 가벼운 천식기가 있어 냉방 중의 창문을 여는 일조 차 주춤하게 되고, 눈의 피로에도 내비게이션을 통해 송신되는 신기술 위성방송을 시청해야 한다.

그런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의 답사철 학과 무관하게, 우리는 너무도 세심한 여행 매뉴얼을 준수하느라, 피로한 공간이동에 매번 직 면하게 된다. 이는 노동의 은폐이자 또 다른 노동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하건 답사를 하건 그 장소의 고유한 본질이 과연 아는 만큼 보이는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장소를 대하 기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앞의 풍경은 뒤로 물러서고, 거꾸로 학습된 선관념이 장소의 고유성을 휘발시키는 일이 자주 나타난다.

현대인에게 제시된 여러 형태의 여행이나 기행은 상품미학의 촘촘한 내포적 장치에서 자 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대학생들에게 여행조차 스펙(경력쌓기)의 일환이 되어, 지구적인 문화기행을 제도화하는 일과 유사한 아이러니다. 루카치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다’고 했을 때, 길 위에서의 끝없는 우연과 시행착오야말로 인간적 성숙의 전제조건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끝없는 모험이고 거듭 미지에 직면하는 일을 통해 자 기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이 예기치 않은 우연을 동반하면서 한 인간을 성숙시키듯, 여행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시간과 장소 역시 우연으로 던져지지만 그것 을 의미화하고 필연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장소성의 내밀한 육체와 대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각종 여행이나 기행의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여정은 상업적으로 매뉴얼화되어 있다. <론리 플래닛>으로 상징되는 여러 버전 의 여행가이드 책은 우리가 이동하는 지구상 거의 모든 장소를 자본의 심상지리지로 탈색시켜 버렸다. 장소의 역사성과 고유성은 ‘관광지’라는 보편적 문화 산업의 매뉴얼화된 표상으로 응 결되어 경로화된 이동과 탐색의 동선을 규격화한다.

2. 근원적 진리 추구와 역사의 왜곡

오늘날 우리는 상품화된 여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여행 자체가 어떤 근원적 진 리나 사유와 접촉하는 일에 해당된다는 생각을 하던 시대도 있었다. 이른바 종교적 성인들이 남긴 숱한 순례의 기록이 그러하겠지만, 범속한 차원에서도 익숙한 공간을 떠나 길 위에서 사 유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토대를 반성한다는 가외의 효과를 내포할 수 있었다. 가령 일본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데카르트 사유의 고유성을 거론하면서, 그가 수년에 걸쳐 아프 리카를 유랑한 체험을 예로 든 것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이명원 경희대 교수. 문학박사. <문화일보> 신춘문예(1993)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사제 카르텔 논쟁’과 ‘표절 시비’ 등 문단의 지배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로 주목받았다. 저서로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말과 사람> 등이 있다. <실천문학사>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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