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7 10:12 수정 : 2013.08.07 22:51

이태원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40대가 된 남자는 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태원을 찾았다. 오랜만이었다. 20대 시절 이태원에 드나들며 록음악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던 클럽들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때는 볼 수 없던 터키 음식점에 자리 잡고 식사하고는 터키 스타일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추억을 불러내보았다. 덥고 습한 장마철 공기 속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이슬람교도들은 예고 없이 내리는 장맛비에 흰옷을 적시며 이슬람 성원 앞 도깨비시장 골목을 잰걸음으로 지나갔다.

세계적 하드록 밴드 딥퍼플은 어릴 적부터 기타에 소질을 보인 블루비에게 로커의 꿈을 품도록 했다. 사진은 딥퍼플 티셔츠를 입은 40대의 블루비(왼쪽)와 해방촌 달동네에서 내려다 본 또 다른 서울.
홍천에서 기타로 주름 잡고 이태원 입성

3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변기엽씨는 강원도 홍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누나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자라서인지 피아노는 여성의 악기라는 괜한 편견이 있었다. 반면 6살 터울의 친형과 그의 친구들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노는 모습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한국 남성 대부분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기엽군은 ‘기타야말로 멋진 악기이고 남자가 연주할 만하다’는 또 다른 편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이유로는 어린 기엽군의 여린 손가락이 기타를 자주 품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지나자 기엽군은 동네에서 기타에 일가견 있는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불과 중학교 1학년 때 대학가요제 풍의 노래 ‘나 어떡해’, ‘젊은 미소’, ‘윷놀이’ 등을 연주했고, 이내 중학생 밴드를 결성했다. 중학생 밴드는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갈라치면 기타는 물론 드럼 세트까지 짊어지고 따라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밴드 세트를 차려놓고 연주를 뽐냈다.

공부보다는 여섯 줄 악기에 빠져들던 청소년 기엽에게 로커의 꿈을 품도록 만든 이는 세계적인 하드록 밴드 딥퍼플이었다. 그리고 이전 한국 음악과는 다른 들국화의 데뷔 앨범이 한몫했다. 특히 텔레비전에서 DJ 김광한이 진행하는 <쇼! 비디오자키>에서 본 에릭 클랩턴의 영상은 아직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턴이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을 연주하는 장면을 보다가 기엽군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저거야!”

중학교 3학년 때 일찌감치 고등학생 밴드 멤버로 스카우트된 기엽군은 홍천고등학교 스쿨밴드 티엔티(TNT)의 3기 멤버로서 고등학교 2학년 형들과 함께 연주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교 생활은 주변에서 익히 보아온 아웃사이더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밤새도록 기타를 연주하다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다반사고, 교실이 아니라 교무실로 등교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른 길’로 가기 바란 한 여선생님은 책 <데미안>을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기엽군이 교화될 리 없었다. 결국 1987년 11월 11일, 그는 남보다 일찍 학창 시절을 마감했다. (훗날 검정고시로 학력을 취득했다.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기엽군이 자퇴할 당시 6살 터울의 형은 군대에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형한테 맞아죽었을 테니까.)

홍천 읍내에 있는 서점에는 음악잡지 <뮤직랜드>가 두 부씩 들어왔다. 기엽군과 그의 형이 구매자였다. 잡지에는 당시 유명한 록 뮤지션 이중산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멋있는 로커의 삶을 사는 것처럼 그린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이중산이 서울에서 세광음악학원을 운영한다는 정보까지 함께 입수할 수 있었다. 음악을 제대로 해보기로 작심한 기엽군은 무작정 상경해 서울 창신동에서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4만 원짜리 셋방을 구한다.

‘한국의 잭 와일드’ 록 스피릿에 젖다

그는 세광음악학원에 기타를 배우러 다니면서 인연이 닿은 이들과 록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신화’라는 록밴드 이름으로 록밴드들의 필수 코스인 ‘파고다 연극관’(일명 파고다 극장)에 데뷔했다. 변기엽군은 이제 기타리스트 ‘블루비’(Blue B)가 된 것이다. 이어 또 다른 밴드 라이징 선(Rising Sun)을 통해 더욱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나갔고, 역시 당대 록음악인들이 모여들던 ‘송설’에서 공연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 무렵 이태원은 그가 록음악을 만끽하기 위해 찾는 동네이기도 했다. 음악잡지가 단 두 부 들어오는 홍천에선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이태원에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한국 록의 대부’로까지 추앙받는 신중현,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록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 부자가 운영하는 공연장 ‘록월드’도 이태원에 있었다. 즉 이태원은 음악을 감상하고 마음껏 놀기 위한 동네였지만, 록 기타리스트로서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 다른 밴드인 바빌론 드림(Babylon Dream)을 거친 블루비는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 스스로 밴드 집시(Gipsy)를 조직했다. 특유의 힘 있는 연주와 강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블루비를 ‘한국의 잭 와일드’라고 쑥덕이기 시작했다. 지금 잭 와일드의 모습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마초에 가깝지만,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훤칠한 미남으로 오지 오스번(Ozzy Osbourne)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 역시 그 무렵 블루비의 연주 모습을 보고 대번에 잭 와일드를 떠올렸다.

한국의 3대 록 밴드 가운데 하나던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에서 기타리스트 김재만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 즉 보컬리스트 박영철 등은 모두 독립해 밴드를 꾸리고 있었다. 블루비의 소문을 들은 박영철은 블루비를 삼고초려 끝에 스카우트했다. 그래서 탄생한 밴드가 제트(Zett)다. 블랙 신드롬과 집시 말고 터보(Turbo) 출신의 허준석까지 함께한 제트는 나름 슈퍼밴드에 가까운 기대주였다. 당시 음반기획사 예당과 계약하고 발표한 제트의 앨범은, 비록 기획사가 억지로 끼워넣은 발라드 한 곡이 뜬금없었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한 록음악을 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수록된 곡 대부분을 작곡한 사람이 블루비다.

일본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던 록밴드 배드 문 라이징(Bad Moon Rising)이 한국을 찾았을 때, 블루비는 제트 멤버와 함께 연주를 펼쳤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태원을 찾아 당구 치고 다트게임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태원은 놀이터 이상이었다.

비바백화점 건너편에 있던 ‘잼’에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감동받았고, 음악인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들던 ‘트와일라잇 존’과 ‘파리지안느’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무엇보다 입구부터 깨진 병 조각이 널려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한 곳이다. 게다가 덩치 큰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던 ‘헤비메탈’은 국적을 불문하고 록음악에 미친 사람들로 북적였다. 강렬한 록과 헤비메탈을 들으며 머리카락 긴 사내들은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고 몸을 부딪혔다. 거기에는 블루비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헤비메탈 밴드 크래쉬(Crash)의 안흥찬이나 나티(Naty), 그리고 블랙 신드롬의 멤버도 드나들었다. 힙합에 ‘문나이트’가 있다면, 록에는 ‘헤비메탈’이 있었다.

블랙 신드롬, 크래쉬, 그리고 블루비의 ‘제2 고향’

크지 않은 체구에 술도 많이 안 마시는 블루비는 ‘지기 싫어서’ 거칠게 논 시절을 떠올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단지 놀고 마시던 것이 아니었다. 블루비를 포함한 한국의 록음악인들은 이태원에서 록 문화, 록에 미친 사람들, 얽매이지 않는 삶, 그리고 록의 본고장에서 바로 건너온 트렌드를 직접 경험했다. 한편 그 윗세대의 록음악과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록음악의 결이 확연히 다른 것도 이런 경험의 차이 때문일 수 있다. 블루비에게 이태원은 다시금 ‘그래, 이거다!’ 하는 확신을 심어준 곳이었다.

자신의 밴드 집시 대신 선택한 밴드이자 많은 기대를 건 제트는 서서히 와해되고 있었다. 밴드(Band)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유대로 이루어지지만 경우에 따라서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는 흔적이 되기도 한다. 주도권을 쥔 멤버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기획사는 ‘헤비한’ 음악을 하는 록밴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그때 이 기획사에 예쁘장한 얼굴과 대중적인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영입되었으니, 바로 김경호였다. 블루비는 제트보다 김경호 밴드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제트는 소속사를 잃고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블루비는 여러 유명 가수들의 세션 기타리스트로 녹음과 공연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국의 현실은 록밴드 활동보다 세션 연주자 활동이 수입 면에서 오히려 나았다. 결국 전문적인 세션 연주자의 실력을 쌓고 폭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감성과 기법을 공부하러 유학을 떠난다. 2005∼2011년 일본에서 재즈를 공부했다.

밴드 ‘제트’ 해체 뒤 유학… 록은 죽지 않는다

한국으로 돌아온 블루비가 마음을 쏟은 일은 또 다른 록 밴드 결성이었다. 20대 시절부터 한참 위의 선배들과 어깨를 겨루던 그는 어느덧 40대가 되었다. 음악인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분위기를 가진 일본과 달리, 한국의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했고 어정쩡한 세대의 로커들에겐 더욱 그러했다. 모든 것이 경쟁이 된 시대를 살며 블루비는 ‘기다려주는 것’에 대한 가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 그가 다시 록밴드를 꾸리게 된 데는 젊은 날 이태원에서 체험한 록의 정신, 그리고 한국 록음악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책임감 때문이다.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되 대중성과 실험성의 조화를 지향하는 밴드 퓨어(Pure)는 이런 생각의 산물이다.

주말이 아니다 보니 원숭이 떼처럼 취한 채로 무리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 평화로운 이태원 거리를 걷던 블루비는 어딘지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록음악의 전성시대, 그 절정의 상징이던 이태원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무렵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들떠 있던 기운은 어딘가로 떠나갔다. 뒤이어 찾아온 힙합의 절정기를 이태원에서 맞이한 이들이 나중에 느끼게 된 감정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이태원은 문화와 세대가 차례로 자리를 주고받는 회전문이었다.

문득 블루비는 동생을 떠올렸다. 형에게 음악적 영향을 받은 블루비는 동생에게도 그 영향을 미쳤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까지 농구선수로 활약한 동생은 블루비가 록 기타리스트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 자주 찾아온 형제였다. 젊은 날 오늘의 블루비를 만든 이태원 근처 어디에서, 지금 그의 동생은 카페를 운영하며 커피를 만들고 있다.

나도원
글·사진 나도원, 자료사진 변기엽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및 장르분과장,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이 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최근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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