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3:30 수정 : 2013.08.08 17:53

북한에 관심 있는 사람이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옛말에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한반도가 처한 현실에서는 직접 보는 게 불 가능한 만큼 영상물이나 관련 도서, 인터넷에 두루 알려진 자료 등을 찾아보는 간접적인 방법 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자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된다.

영화 <어떤 나라>의 과장성

얼마 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분이 북한을 소개한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를 흥미롭게 보았다며 반색했다. 그는 “우리에게 생소한 북한의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다룬 내용이라 재미 있게 보았는데 정전이 되니까 이것이 미국 놈들 때문이라면서 할아버지가 무척 분노하는 장면 이 나왔다”며 “실제로 북한 주민들이 평상시 미국을 그토록 증오하는가”라고 물었다. 다행히 내가 그 다큐멘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의문을 풀어줄 수 있 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 당국이 미국의 공화국 봉쇄 책동으로 인해 나라 전반의 경제 사정이 어렵다고 강연 회 때마다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뇌교육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지만 정전처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가지고 미국을 비난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 다큐멘터리가 공개적으로 촬영한 것이라 과장해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감독과 배우의 속마음은 어찌되었든간에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해야만 사상성이 투철한 것으로 인 정되니까요. 북한 자체가 표현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금지된 곳임을 염두에 둔다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겁니다.”

그분은 “다큐멘터리를 보고난 뒤 북한 주민의 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가 일상생활에서조 차 저렇게 뿌리 깊은지 의심스러웠는데 이제는 이해가 됐다”면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어 떤 나라>에 등장하는 가족이 평범한 북한 주민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 정도의 가정 형편은 상위 10% 안에 들어야 가능하다는 사실도 그분에게 설명할 때 빠뜨릴 수 없었다.

물론 북한 사회를 전부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북한이라는 곳을 이해하는 데 내가 말한 내용이 하나의 퍼즐 조각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려드렸다. 그분 역시 자신이 남한에서 태어났 다고 해서 남한을 다 알지 못한다면서 거듭 공감했다.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북한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이 누군지 얘기해봤으면 한 다. 그 영화인은 바로 남과 북을 오가며 스스로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 신상옥 감독 (2006년 4월 11일 타계)이다. 북한 주민에게 신필름이 끼친 영향력은 막대했다. 신 감독이 북한 을 탈출한 지 30년이 가까워오지만 폐쇄적인 북한 사회구조의 경직된 틀에 얽매인 채 딱딱한 대사와 뻔하고 고루한 내용 전개로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던 북한 영화계가 신 감독의 등장 으로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 감독의 지도를 통해 만들어져 세상에 나온 영화들은 선진 촬영 기법과 연출 방법을 도입했으며, 심금을 울리는 진 솔한 대사와 감정에 충실한 배역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미술, 음악, 조명, 소품 하나하나에 이 르기까지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영화 상영 직전 영어로 미끄 러지듯 새겨지는 ‘신필림’이라는 자막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신 감독 사상 검증 없이 전폭 지원

신필름 영화들은 대개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해외 촬영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김정일 위원장의 절대적인 신임과 후원으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제작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실 제 신 감독이 총장으로 있던 신필름 영화촬영소에 해마다 지원된 예산이 300만 달러에 달했 다고 전해진다. 당시 북한 경제 형편이 그렇게 넉넉지 못했는데도 김 위원장은 신 감독의 요구 사항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 없다고 하니, 그 신임은 가히 절대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랬을지언정 북한 사회 특유의 경직성으로 인해 영화 제작이 의도한 것처럼 순조롭지만 은 않았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삶을 거침없이 살아오던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고충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북한을 탈출하기까지 머문 기간은 8년(1978~86) 남짓이었다. 신 필름 영화촬영소가 설립돼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들어간 때가 1983년이었음을 감안해본다 면 불과 3년 남짓한 사이에 신 감독은 20편의 영화를 만든 셈이다. 한 해 평균 7편의 영화를 제 작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할 정도여서 북한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 었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이 영화 제작에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뒷 배경이 있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신 감독이 직접 연출한 영화는 <돌아오지 않은 밀사> <소 금> <탈출기> <심청전> <불가사리> <사랑 사랑 내 사랑> 등 7편이다. 간접적으로 기획하고 시 나리오·연기·촬영 등 모든 업무를 지도하며 만든 영화는 <길> <철길 따라 천만리> <헤어져 언 제까지> <약속> <붉은 날개>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조선아 달려라> <임꺽정>(1·2·3부) <홍 길동> 등 13편이다. 영화의 완성도나 시나리오 전개가 워낙 탄탄해 관객의 사랑과 인기를 한 몸 에 받은 신 감독은 말 그대로 북한 영화계에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동명숙 함경북도 청진 출신.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됐다. 경북 안동에서 7년 동안 식당일을 하고, 그사이 결혼해 가정을 꾸렸으며, 2010년 동국대 북한학과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 생활을 하고 있다. 생활력 강한 함경도 ‘또순이’와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캔디’가 동시에 있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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