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3:10 수정 : 2013.08.07 18:00

새삼스럽게 말해보면, ‘잉여’라는 개념은 무언가로부터 남은 것이라는 어떤 사물의 중립적인 상태에 대한 묘사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잉여’는 오늘날의 세계로부터 남겨진 것들을 뜻하는 이름이다. 물론 세계는 시작부터 지 금까지 언제나 특정한 비율의 잉여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잉여가 되는 것과, 그것을 관리하는 방식은 역사 적으로 시시각각 변해왔다.

세계가 잉여에 대해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게 된 것은 근대가 도래하면서부터다. 그 이전의 시간에서 잉여는 다양 한 형태의 운명과 우연 속에 존재했다. 반면에 근대는 세계 를 모두 알 수 있고, 또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시대 였다.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의 어둠을 견디지 못했고, 모든 비이성, 불명료함, 미신, 무지몽매함, 비정상을 세상에서 소 거하기 원했다. 한량, 범죄자, 빈민, 유색인종, 동성애자, 광 인, 장애인 등의 비정상적인 존재를 정상적인 존재로, 즉 유 순하고 근면한 노동자로 바꿔놓을 때까지 교화와 치료가 반복되었다. 또 미개인의 땅에 문명을 전파하는 것은 일종 의 의무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낭비하고 있는 드넓은 대지 와 부와 노동력을 취해 더 유용하고 효율적인 일에 사용하 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일로 여겨졌다.

강박관념이 된 대상

요컨대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이 원한 세상은 잉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나머지가 0인 나눗셈 같은 세상이었 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하려 했다. 그들 의 강박적 ‘오지랖’이 행성의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 했으니 침탈, 전쟁, 학살, 전염병, 약탈, 노예무역, 식민주의 가 온 세계를 뒤덮었다. 사람을 너무 혹사시키거나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사실과, 자연에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 실을 알게 되기까지 이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반면에, 그 이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반란의 기운이 짙게 깔려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열망은 멈추 지 않고 나아갔고, 타자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의 각성도 있 었으며, 세상에 퍼져 있는 불의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극 복해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무고하고 선량하며 억압받 는 다수, 프롤레타리아와 하위주체(Subaltern)들이 역사 의 고고한 흐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에게 는 세상을 뒤엎어야 할 이유와 힘과 정당성이 있으니, 필요 한 것은 이들이 세계를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게 도와줄 이 론과 세계관뿐이었다. 파업과 사보타주, 봉기와 혁명, 공동 체와 박애주의 정신이 멈추지 않고 일어섰다. 계급과 민족 과 성과 억압받는 모든 것의 이름이 펄럭였다.

우리는 오늘 어떤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가령, 인도 출 신의 탈식민주의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이 던진 어떤 유명한 질문(“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은 종속 혹은 피지배 라는 문제가 갖고 있는 복잡한 결을 드러냈다. 그는 식민주 의자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같 은 질문을 던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해방에 대한 기존 담론을 막다른 길로 인도했다고 해야 할까. 간단하게 축약하면 이것은 어떤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다. 종속 혹은 피지배자들은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분석하고 구조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는 능력이 부 재하다. 이 때문에 이 작업은 그들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갖 고 있는 중간계급의 좌파(학자)들의 몫으로 여겨져 왔지만,

그들이 피지배자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에는 명백하고도 무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결국 고통과 모순을 끌어안고 있으나 말할 수 없는 ‘당사자’인 피지배자들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온전하게 재현하거나 대변할 수 없는 ‘제3자’인 좌파들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좌파들의 해방담론은 언제나 그 주체가 되는 피지배자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민중’의 실재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한편 스피박과 함께 탈식민주의의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던 알제리의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의 이야기는 더욱 곤란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자신의 흑인 동포들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억압받는 자의 무고함, 선함, 신성함 같은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은 고통을 주고, 사람들은 고통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망가지며, 다른 누구보다 식민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내면화한다. 그들은 빵 한 조각을 위해 동족을 배신하며, 백인-식민주의자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분노는 식민주의자가 아니라 나보다 더 약한 자를 향해 뻗어가기 십상이다. 지배와 종속의 폭력은 악순환을 그리며 피해자들을 작은 가해자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선량함’이라는 미덕마저도 종속된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근대와 다른 현대의 잉여 취급법

이런 딜레마들은 오늘날의 잉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의 잉여들이 겪어야 하는 상황은 더 험난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 그 자체가 된 새로운 자본주의는 과거 근대인들의 강박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강한 억압에는 대체로 강한 반발이 따르기도 하거니와, 잉여들을 굳이 교정과 교화를 통해서 노동자로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굳이 설파하지 않아도 먹고살려면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미 익숙하다. 게다가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통해 우리는 더 적은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냈다. 이런 조건들은 오늘날 세계가 보여주는 쿨한 태도의 좋은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세계의 말석 옆에 놓인 간이의자에라도 앉기 위해 발버둥 치고, 세계는 불만 있는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팔짱만 끼고 있어도 된다. 최근 몇 번의 채용 공고 논란에서 나타났듯이, 세계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회화와 제2외국어가 가능하면 무급 인턴으로 ‘우대’해준다.

오늘날 세계가 잉여를 관리하는 모습은 일종의 ‘두더지 게임’ 같은 것이다. 세계는 상자 안의 두더지들이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튀어나오는 것들은 효용성의 여부에 따라서 유행이 되거나 유령이 된다. 유행이 되어 전시되는 두더지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세상의 증표로 삼기 위해 박제되고, 유령이 되어 쫓겨나는 것들은 ‘관리’의 강고함을 과시하기 위해 조롱과 모욕 속에서 철저하게 진압된다. 상자 안의 두더지들은 좁은 구멍으로 보이는 파편적인 장면을 통해 학습된다.

게다가 상자 안의 두더지는 점점 늘어간다. 과거의 기준이라면 멀쩡하고도 남았을 이들도 잉여의 대열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의 표현대로 “취업을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취업이 되지 않아 ‘알바’가 되고. ‘백수’가 되고, 심지어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되는 불행한 예”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최태섭 문화평론가. 팔자에 없을 것 같던 글과 말을 업으로 삼은 이후 매일같이 ‘멘붕’(멘탈붕괴)에 빠져 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가지 평등주의> 등을 공저했으며, 현재 ‘잉여’를 주제로 책을 집필 중이다. 성공회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과정에 있다. 이런저런 매체에 글을 쓴다. 장래 희망은 먹고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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