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3:08 수정 : 2013.08.07 17:59

‘오타쿠’는 본디 오랫동안 부르주아 내부에서 향유되어 온 ‘고급문화’나 매스미디어에 의해 유통되는 대중문화, 양 자 모두와 구별되는 서브컬처 영역에서 비롯했다. 문화를 이렇게 삼분하는 것은 물론 자의적이다. 실제로 명확히 구 별되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서로 섞여 있던 것들이 분화되 거나 혹은 명확히 구분되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 스럽게 통합되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영역(시장)에 나름 의 메커니즘이 존재하고, 이는 당대 사회에 현전하는 계급 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오타쿠, 너드(Nerd·미국 등 에서 컴퓨터 등에는 이상할 정도로 통달했지만 사회성이 떨어지고 데이트도 못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 같은 인간 군상들이 20세기 후반에 쏟아져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구심력을 잃어가는 중간계급 문화가 만들어낸 산 물의 일부다.

아는 사람만 아는 ‘소수자 되기’

사회적으로 인준된 취향을 즐기는 이들은 오타쿠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들은 애호가·감식가·전문가 등으로 호 명되는데 흔히 ‘마니아’라 일컫는다. 분야는 서양 고전음악, 고미술, 와인 등이 대표적이다. 오타쿠, 덕후라는 존재가 도사린 영역은 이와 다르다. 가장 또렷한 차이는 제도화 정 도다. 이른바 ‘고급문화’일수록 실기와 이론(비평)의 축적 을 통해 예술로서 권위를 유지하는 장치가 발달했다. 서브 컬처의 경우, 비평은 전무하거나 있다 하더라도 매우 제한 적인 지위와 기능에 국한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서 브컬처에서 미학적 판정은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타쿠에게는 일종의 ‘소수 취향’이라 할 만한 특징이 도드 라진다.

“‘아이도리안’이라 불리는 오타쿠가 있다. 이는 여성 아 이돌 가수를 쫓아다니며 그녀들에 관한 그 어떤 세세한 정 보도 놓치지 않고 수집하는 오타쿠를 말한다. (중략) 아이 도리안에게서 볼 수 있는 현저한 특징, 일반인들은 쉽게 이 해할 수 없는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이류, 삼류의 아직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수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받드는 아이돌 가수는 결코 국민적인 인기 를 얻고 있는 대형 아이돌 가수가 아니다. 아이도리안에게 아이돌 가수는 마이너에 속하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대 상일수록 좋은 것이다. 인기를 얻게 되고 이른바 잘 팔리는 가수가 되어버린 아이돌 가수는 더 이상 아이도리안의 몰 입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사와 마사치·‘오타쿠론’ ·<전자 미디어, 신체·타자·권력>·2013·222~223쪽)

오타쿠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와 다르며 생각 만큼 반사회적이지 않다. 되레 오타쿠들은 커뮤니티 내부 의 인정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즉, ‘아는 사람들은 아는’ 어 떤 영역에서 탁월성을 과시함으로써 동류들의 공감과 인정 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다수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끝없 이 소수가 되는 이 전략은 ‘지난 세기 예술가들’, 곧 보헤미 안을 자처하던 낭만주의자와 아방가르드를 자임하던 모더 니스트들의 전략과 비슷하다.

아름다움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자의식은 몇 개의 테제로 정리된 거창한 선언으로 발표됐다. ‘대중과의 차별화’, ‘소수자 되기’는 오타쿠와 지난 세기 예술가들의 공통점이다. ‘중2병적 제스처’만 놓고 보면 이들은 외형상 구별 불가능한 존재이다. 양자의 결정적 차이는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나온다.

지난 세기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건 다른 이에게도 아름답다’는 강렬한 믿음을 어떤 형태로든 갖고 있었다. 미학적 투쟁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미학적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한편 오타쿠에게는 이런 총체성(Totality)의 감각이 희박하다. “오타쿠는 현실과 망상을 구별 못한다”는 식의 주장이 자주 튀어나오지만, 터무니없는 오해다. 그들은 이른바 ‘덕질’의 영역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잘 알고 있고, 자신이 현실세계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명확히 의식하고 있다. 오히려 현실과 망상을 너무 철저하게 구별하는 것이 대다수 오타쿠의 특징이다. “현실의 외부에 또 하나의 현실을 구축하는 것”(오사와 마사치)이 바로 오타쿠이고 이들에게는 덕질의 영역과 현실세계 사이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 두 개의 세계가 지나치게 분리되는 바람에 세계의 연속성이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 예술가와 달리 총체성을 사고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386에 진정성 부여하는 사회

오타쿠로 대표되는 새로운 주체들, 세계에 대한 이런 태도의 변화를 두고 여러 논자는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아즈마 히로키), ‘근대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 ‘진정성의 종언’(김홍중) 등으로 개념화한 바 있다. 이 논의는 각각의 맥락을 지니고 있지만- 이를테면 김홍중은 가라타니의 주장과 달리 ‘문학만 끝난 게 아니라 문학의 외부에 이미 진정성은 과거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공통적으로 지난 세기의 특정한 주체화 양식의 종말을 선언하는 묵시록적 테제들이다. 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동물·속물론을 언급하고 있고, 명시적이든 아니든 우리는 이제 ‘동물화한 포스트모던 시대’로 들어섰음을 주장한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을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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