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2:45 수정 : 2013.07.05 10:43

리빙 더 월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 공경희 옮김 밝은세상 펴냄 1만4500원

제인은 스미스대학을 나왔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명문 여자대학이 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제인은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한다. 아내가 있는 지도교수와 불륜관계인 제인은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도교수가 바뀌는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어쨌든 제인 은 박사 학위를 받는다. 졸업논문이 통과되고 난 뒤, 취업지원실로부터 위스콘 신대학에서 자신을 조교수로 채용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는다.

“정년트랙 채용- 요건을 수행하면 정년을 보장받는 채용방식- 이에요. 위 스콘신대학은 일류에 속하죠.”(72쪽)

더글러스 케네디의 <리빙 더 월드>(이하 리빙)를 읽던 마태우스는 이 대목 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며 혼잣말을 했다. “조교수라니. 조교가 아니고, 시간강 사도 아니고, 조교수라니!”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스미스대학을 이화 여대에, 하버드대학을 서울대에 비유한다면, 이화여대 출신이 서울대 대학원에 가서 학위를 따고 곧바로 다른 명문대 조교수 자리를 얻는다는 얘기다. 서울대 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은 이 땅에서 가 능하지 않을 성싶다.

첫째, 제인은 훌륭한 박사 논문 덕분에 교수 자리를 얻는다.

자신의 추문에 대해 얘기하는 학과장에게 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 개인사로 업무 능력을 평가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박사 논문을 보고 실력을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154쪽)

이 당돌한 말에 대한 학과장의 답. “논문을 읽어봤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일급 논문이더군요. 제가 선뜻 하워드 교수를 채용하기로 결정한 건 바로 논문 때문이었죠.”(같은 쪽)

우리나라 교수 공채 때 지원자의 박사 논문을 읽어보는 교수가 얼마나 될 까? 마태우스가 아는 어떤 교수는 남의 것을 그대로 베낀, 그것도 남이 써줬다 는 의혹을 받은 논문으로 동아대 교수가 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 라 대학의 심사위원들은 논문보다 외모나 명성 등 다른 면을 보는 것 같다.

둘째, 학생에 대한 징계안을 내놓은 제인에게 학과장은 이런 말을 한다.

“역시 하버드 출신다운 생각입니다.”(163쪽)

우리나라는 무서우리만큼 출신 학부를 따진다. 박사과정을 아무리 좋은 곳에서 해도 그 사람은 학부로밖에 평가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출신 학부는 평 생을 따라다니며 그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그런 점에서 제인이 학과장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건, 우리나라 풍토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다. 이대 출신이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했다고 해서 “역시 서울대 출신은 다르

다”고 말하지 않는다.

셋째, 제인은 두 번이나 교수직을 제안받는다.

처음 자신을 원한 위스콘신대학을 거절한 제인은 취직한 직장에서 불미스 러운 일로 쫓겨난 뒤 하버드대학 취업지원실로 전자우편을 보내 일자리를 찾아 달라고 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답이 왔다. “뉴잉글랜드주립대 영문과에 자리 가 났으니 최대한 빨리 전화주세요.”(152쪽)

기가 막힌다. 미국에서 영문과면 우리나라에선 국문과일 텐데, 국문학 박 사가 이렇게 취직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다. 얼마 전 배제대에서 국문과를 없앴다. 이유는 간단했다. 취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취업 실적에 따라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는 터라, 취업률이 낮은 국문과는 대학으로 보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배제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몇몇 대학에서 국문과를 폐지한 걸로 보아, 10년쯤 지나면 국문과가 아예 없어질지 모른다. 서울대를 나와도 오 랫동안 ‘보따리장수’라 불리는 시간강사를 하며 교수직을 기다리는 처지에, 소설 이긴 해도 여성이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교수가 되는 이야기에서 마태우스는 입 이 딱 벌어졌다. 게다가 제인은 첫 번째 추천한 대학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뉴잉 글랜드주립대도 탐탁지 않아 한다. “고교 시절 내내 빈둥거리거나 대학에서 공 부보다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길 바라는 학생들이 가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152쪽)이라는 게 제인이 망설인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 면 당장 멱살을 틀어쥐고 이런 말을 했으리라. “호강에 겨운 소리하지 마!”

우리나라에서 국어가 홀대받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어려 서부터 영어몰입교육을 받는다. 아이가 영어 대신 우리말을 쓰면 야단치는 엄마 가 한둘이 아니다. 뉴스 전문 채널 은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영어토 론대회를 진행한다. 우리나라 말을 제대로 못 쓰는 건 이제 흉이 아니다. ‘어이없 다’를 ‘어의없다’로 쓰고, ‘선동렬이 낳냐, 최동원이 낳냐’는 식의 오기는 하도 많 이 등장해서 ‘낳다’가 맞는 표현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국문과가 없어지는 것 도 그 연장선이다. 우리나라 언어를 갈고닦으려는 마음이 없는 나라에서 국문과 가 필요한 까닭이 뭐란 말인가? 소설이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다면, <리빙>에 나오는 미국의 환경은 수많은 박사들이 거리를 떠도는 우리 현실과 너무 달랐 다. 한강으로 간 마태우스는 강을 바라보며 외쳤다.

“새종대왕님, 대채 한글은 왜 맨드신 검니까, 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서민 수줍음이 너무 많아, 같은 사람을 다시 볼 때도 매번 처음 보듯 쭈뼛거린다. 하지만 1시간 이상 대화하 다 보면 10년지기처럼 군다. 기생충학을 전공했고, 현재 단국대 의과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기생충의 변명>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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