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2:04 수정 : 2013.07.05 10:41

강영민 : 다양한 문화 장르를 넘나들며 전방위적 활동을 해온 팝아티스트. 개인전을 여섯 차례 열었고, 낸시랭의 , 전, 전 등을 기획했다. 최근에는 ‘소셜팝’ 장르를 개척해 서울문화재단·월드비전과 함께 서울 청계광장에서 아트 캠페인을 열었다. ‘박정희와 팝아트 투어’, ‘5·18과 팝아트투어’ 등 대한민국 현대사를 둘러보는 관광 프 로 그램 을 진행하고 있다.
강영민은 팝아티스트 혹은 캐릭터 아티스트로 잘 알 려져 있다. ‘조는 하트’(Sleeping Heart)는 그의 작업에서 상징처럼 등장해왔다. 가는 눈을 뜨고 평온스럽게 조는 듯 한 모습의 귀여운 하트는 이미 예술계뿐만 아니라 대중적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예술의 길에 들어서 대중과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확실한 방법을 찾다가 그는 ‘팝아트’를 선택한다. 그가 팝아트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남다르다. 강영민은 뉴미디어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미술이 어떤 장르보다 엘리트적이고 편협한 미학적 정서를 장기로 삼는 사실에 크게 회의하면서 그만 두고 돌아와 팝아트의 길로 접어든다.

강영민은 그의 작가 인생에서 최근 다시 한번 새로운 질적 변화를 겪고 있는 듯하다. 그 징후는 이제까지의 손에 잡히는 창작품에서보다는 그의 온·오프 라인 행보에서 두 드러진다. 대한민국 팝아트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접근과 해 석, 온라인 내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 현상에 대한 주목이나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에 밀착하려는 그의 작가 실험에 자 꾸 눈길이 가는 이유다.

일베들아, 나와서 놀자!

내 페북 친구(페친) 중 그는 독보적이다. 말이 제일 많 다. 한국 사회 현실의 독법과 관련해 솔직 담백한 글을 매 순간 쏟아낸다. 예술가가 맞나 할 정도로 그는 ‘페북질’(페 이스북에 올리는 잉여 글쓰기 행위를 낮춰 부르는 말)에 열 중이다. 강영민의 고백처럼, 그는 아침에 눈 뜨면 ‘일간 베 스트 저장소’(이하 일베)에 들어가, 밤새 수챗구멍에 쌓인 오물 털 듯 일베에 오른 무수한 글을 열람하면서 그중 함께 공유할 게시글을 깨끗이 골라내 페친이나 트친에게 선사 한다. 마치 희멀건 국에서 왕건이 건지듯 말이다.

요즘 대중문화 현상에서 일베만큼 주목받는 이슈는 흔 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회 주요 입담꾼과 현실분석가들은 이들과 대거리를 피하거나 아예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는 다. 이들을 잘못 들쑤시면, 되레 표적이 되어 물어뜯기기 십 상이다. 그나마 몇몇 논객이 일베에 관한 단상을 적거나 흘 리듯 평가해온 것이 전부다. 예를 들면 황상민(심리학 박사) 은 일베를 ‘쓰레기 저장소’로, 진중권(문화평론가)은 ‘루저’ 로,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은 ‘파시즘’으로 봤다. 대다수 지식인이 일베 현상을 제대로 거론조차 못하는 현실 에서 이들 사회 논객의 발언은 나름 중요한 평가로 볼 수 있 으나, 여전히 뭔가 제대로 된 이해가 부족한 듯 답답하다.

대체로 식자가 이들을 단칼에 진창 보듯 하는 시각과 달리, 작가 강영민의 일베에 대한 관점은 좀 다르다. 간혹 ‘함께 놀자’는 분위기가 있다. 그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마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과 주변인들의 신상까지 일베에 털린 직접적 피해자의 반응으로는 좀 의외다. 그는 일베에 서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본다. 무엇보다 그들이 등 장한 연유로 그는 청년세대의 공동체 몰락을 꼽는다. 현실 사회에서의 합리적 이성과 민주화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만성적 피로감이 일부 젊은이를 좌절하게 하고, 사회 개입에 무관심하고 대단히 삐뚤게 주변화하는 근거가 됐으 리란 판단이다. 그래서 강영민은 한국 사회가 일베를 어떻 게 다룰 것인지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자정과 포용 능력의 시험대가 될 것이라 본다.

그는 최근 주류 언론이 사회로부터 일베를 타자화하거 나 이들을 기성 잣대로 쉽게 재단하려는 메타 비평을 수행 하려 한다고 꼬집는다. 일베가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한

좀더 근원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 식의, 적어도 르포 형식의 진중한 접근법을 제안한다. 예컨대 그는 ‘나의 일베 체험기’ 같은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눈 뜨자마자 그가 일베로 거룩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까닭이다.

팝아트 민주성지투어와 ‘일베 전투기’

강영민에게 예술이란 체험이다. 이성과 계몽의 언어를 부리는 것보다 감성의 경험을 통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그에게 예술의 일이다. 사회적 모범 답안을 줄 수 없지만 그가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상에 대한 경험을 더 강렬하게, 그러나 풍부하게 관객에게 툭 던지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일베 현상은 강영민에게 오늘날 한국 사회의 ‘팝’적 요소를 상징하는 중요한 현상이요, 이에 적극 반응하는 것이 팝아트 작가의 적절한 태도인 셈이다. 문제는 그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일베에 효과적으로 반응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일단 강영민의 온라인 내 팝아트적 반응은, 굳이 표현하면 그가 만들어낸 ‘소셜팝’(Social Pop)이란 말로 압축될 수 있다. 한국적 팝아트 현상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이를 소셜미디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담는 자신의 작업을 지칭한다. 물론 이는 창작 실험의 일환이다. ‘소셜팝 실험’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온라인에서 일베와 놀며, 그들의 흔적을 모니터링하고 체험기를 특징적으로 그려 비판적으로 기록하는 행위다. 매우 사적인 유사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베 이용자의 행위를, 강영민은 차별적 재미를 주는 포르노 문화 정도로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들을 공적 논쟁화하거나 이념의 지형으로 끌어오면 그 실체를 제대로 보기 어렵기에, 그들의 속살을 좀더 잘 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각적으로 문화·예술적 해석과 개입을 수행하도록 요구한다.

맞다. 따지고 보면, 10여 년 세월의 형식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실험을 빼놓고 보면, 전후 줄곧 지긋지긋한 (신)권위주의와 이념의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린 우리 아닌가. 이 점에서 봐도 일베는 돌연변이 괴물이라기보다는 일그러진 우리의 거울 이미지이자 사생아와 다름없다. 박권일(칼럼니스트)의 말처럼, 그들은 현대 국가의 ‘보편 증상’이 드러난 것이자 ‘우리 안의 일베’인 셈이다.

그동안 강영민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계기는, 올 들어 낸시랭과 ‘팝아트 조합’ 구성원과 함께 대구·광주·부산 등을 돌며 ‘팝아트투어’와 강연을 하면서부터다. 박정희 생가에서 작가들과 찍은 인증샷이 일베 게시판에 오르고, 그들의 촉수에 그가 잡히고 덤으로 신상까지 털리면서 일베와 자의 반 타의 반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팝아티스트로서 강영민에게 일베는 이제까지 조금은 무력했던 그의 팝아트 작업에 중요한 도전이자 자극제로 등장한다. 팝아트를 한다면서 나름 전복적 쾌감을 느낀 시절도 있었는데, 그동안 팝아트 자체가 키치화하거나 제도화해가면서 이에 크게 환멸을 느끼던 차였다. ‘팝아트’적 소재 고갈에 지쳐 있던 터에 일베와 조우한 셈이다.

‘조는 하트’가 강영민의 보편적인 팝아트 정서라면, 분명 그는 일베를 한국 내 사회적 무의식에 대한 관심을 좀더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계기로 삼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가 장차 팝아트의 소재로 삼으려 한 내용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치적 무의식’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 기획을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박정희란 ‘신을 찾아서’ 떠나는 생가투어로 잡은 것이다. 박정희 생가 방문에 이어 광주 5·18 민주묘역, 민주공원 등을 돌며 ‘팝아트 조합원’들과 함께 벌이는 투어를 통해, 적어도 그는 우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나 들춰내길 꺼리는 저 아래 무의식과 정면 대면하기 바랐다. 낸시랭은 이같은 투어에 미리 조직되거나 꾸며지지 않은 즉흥성을 담보하는 듀오이자 동지이다. 둘은 최근 경북대, 부산대 등지를 돌며 ‘나의 일베 전투기’란 제목으로 사회적 무의식의 소산인 일베에 대한 체험적 소회와 경험을 대중에게 강연하고 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교수. 뉴미디어와 인터넷 문화, SNS 문화 현상까지 IT 현상 전반에 주목해 글을 써왔고, 최근에 예술행동 영역으로 확장 중이다. 저서로는 <사이버 문화정치>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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