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1:55 수정 : 2013.07.04 14:07

두동댁이 사는 죽정리 마을 뒷산에서 바라본 용방면. 죽정리 주민들은 이제 매실 농사에 기대어 산다. 매실 농장은 높은 곳에도 있다.
지난 6월 9일 일요일. 미루고 미루던 죽정리 길에 나섰다. 전남 구례군에서 매실 농사 규모로는 제일 넓고, 대부분의 매실을 친환경 재배하는 마을이다. 죽정리는 마을 산 위까지 매실밭이 있고, 작업로 성격의 좁은 도로가 이어져 있다.

용방면의 많은 마을이 그렇듯 죽정리 역시 세로로 흐르는 개천을 따라 좌우로 집들이 펼쳐진다. 일요일이어서 집 앞으로 차가 많았다. 읍내에 사는 자식들이 방문했을 것이다. 매실 수확 철이라 모두 일손을 보태러 왔을 것이다. 이 마을의 집들은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으며 거의 동향이다.

죽정리는 매실로 다시 일어서는 중이다. 일반적인 시골의 예정된 미래는 쇠락이다. 2010년 1월에 ‘구례매실생산자영농조합법인’을 설립했다. 2011년 3월에 ‘매실꽃당신’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른 놈은 지난 6월 6일에 수확했지만, 본격적인 수확은 6월 10일부터였다. 미리 수확하고 저장이 가능하다면 일이 수월하겠지만 매실은 그렇지 못하다. 길어봐야 하루 전, 아니면 아침부터 수확한 것을 정신없이 선별해서 오후에 출하한다. 마을에는 전투를 앞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원래 봉덕떡(댁)인데 다른 사람이 있더랑게”

이튿날, 다시 죽정리를 찾았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산 아래 매실밭으로 향했다. 나는 며칠째 두동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죽정리에 사는 구례군 여성농민회 회장 정영이씨가 선별장에 있던 맥주 한 병을 챙겨서 두동댁 매실밭으로 앞장섰다. 산 아래 매실밭 뽀짝(‘바싹’의 방언) 붙어 콩밭이 있다. 완두콩. 두동댁은 매실이 아닌 콩을 따고 있었다.

“아, 예삐도 안 한 노인은 와 찍어샀소.”

두동댁의 손사래는 그렇게 완강하지 않았기에 카메라 셔터를 몇 번 더 눌렀다. 화제는 곧 완두콩으로 넘어갔다.

“덜 익어야 맛나제. 매 익어 뿔믄 맛없제, 콩.”

“매실은 안 따고 콩을 따시네요.”

“시방 나는 다리가 아파서 못 따. 퇴요일에 아들이 올꺼라. 그때까지 따지 마라니….”

하루 전, 나는 죽정리 골목을 따라 내려오다가 정갈해 보이는 집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문패를 확인했다. 그래봤자 그분 택호밖에 모르지만 이상하게 이 집이 두동댁 집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금 더 야릇하게는 이 집이 두동댁 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담벼락 표정은 집주인 표정이기 마련이다. 꽃과 풀이 주인을 닮는 것은 당연하다. 억지 부리지 않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역시 그곳은 두동댁 집이다.

나는 이런 집이 무척 좋다. 화려한 집도 필요 없고 친환경 ‘거시기’ 집에 대한 욕구도 없다. 그런데 이런 집을 보면 탐난다. 그러나 내가 가질 수 없는 집이다. 기억이 존재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입구의 감나무는 50년은 넘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나무에 관한 기억을 가질 수 없다. 장독대에는 많은 이야기가 스며 있을 것이다. 장독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은 생태적 환경만은 아닐 것이다. 그 집의 기억까지 숨 쉬는 것이다.

“매실 따는 것은 작은아들이 하제”

그것이 집이다. 평수와 위치로 좋은 집, 선망의 집을 만드는 것은 세상이 만든 억지다. 반복된 억지는 사람의 욕망과 결합되어 집을 재산 이외의 의미가 희박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두동댁과 댓돌에 나란히 앉았다. 두동댁 손금순 엄니. 올해로 일흔세 해를 살고 있다.

“두동댁이니까 두동이 친정이겠네요?”

“아녀. 두동이 아니라 봉덕인데 죽정리에 다른 봉덕떡(구례에서는 ‘댁’을 ‘떡’으로 발음한다)이 있어. 낭중에 와논께 두동댁이라 했제.”

“언제 시집왔어요?”

“시물.”

스무 살에 옆 마을 봉덕에서 죽정리로 시집왔다.

“조금밖에 못 옮겼다 그죠. 하하하.”

“생전 요 동네만 살았은게.”

같은 용방면 안에서의 위치 이동이었다. 평생 반경 3km 이내에서 살았다.

“어르신은 언제 별세했습니까?”

“… 쉰여섯. 아저씨가 쉰여섯에 환갑도 안 쇠고 갑자기 돌아가셨어. 내가 다섯 살 적은께로. 홧병이제. 큰아들 때문에 확 늙어부렀어. 부끄러워서 말도 못허것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두동댁은 큰아들 일이 부끄럽다고 했다. 큰아들은 1980년대 시대상황을 외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큰아들은 3년을 (징역)살았어요. 순천대학교 댕기면서. 10년 산다고 하더이 3년 만에 나오데. 순천, 광주, 공주로 옮겼어. 징역 살 때 저거 아부지가 죽었어. 우리 아저씨가 새끼들 욕심이 많아. 아들 말 한자리 나쁘게 안 해. 술주정이라고는 안 했어. 시방도 아들들 보고 ‘술 묵는 거는 너거 아부지를 탁해서 잘했다’ 그래. 넘들은 술 먹고 싸우고, 나는 그런 걸 보면 요상해. 저거 아부지는 아들들이 아까와서 못

뭐라 그래. 억지로 죽은 거나 마찬가진게. 아프기는 똑 사흘 아팠어. 시방은 애 터진 일이 없는데….”

쏟아진다. 말씀이 매실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이야기 중에 두동댁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4차선 도로가 마을을 가로지르지만 이전에는 멀리 지리산 노고단을 배경으로 이내가 피어오르는 초저녁 풍경이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노고단이 아니라 그 아래 푸르스름한 기운에 닿아 있을 것이다.

“꽃은 일부러 심었어요?”

분위기를 바꾼다고 튀어나온 말이 꽃이었다.

“꽃은 내가 역부로 숭근 거이고.”

“자녀가?”

“아들 둘, 딸 하나.”

“며느리 두 분에 사위가 한 분이네요.”

“우리 딸이 시집을 안 갔어요. 중매 좀 하쇼. 우리 딸은 넘나 똑똑해가꼬 시집을 못 가.”

“요즘 시집 안 가는 사람 많잖아요. 골치 아프게 뭐 하러 결혼을 하겠어요.”

“낭중에 늙어서는 어쩌꼬? 시방은 벌어먹으니까 저거가 그라고 살지만.”

“그리 애 먹이던 큰아드님은 지금 어디 살아요?”

“순천서 농사지서요. 며느리도 같이. 며느리는 ◯◯◯사무총장까지 했는데 둘이 농사지서.”

“주말에 매실 따러 오나요?”

“우리 작은아들이 하제.”

“어디 있는데요?”

“군청. 저거가 와가꼬, 서방 각시가 와서 북치고 그라제. 나한테는 효자여.”

“어르신 떠나고 자식농사짓느라 엄니 고생이 여간 아니었겠습니다.”

“저거 아부지가 다 해놓고 떠난기라.”

두동댁 시선이 먼 것은 아무래도 영감님 때문인 모양이다. 말씀 곳곳에 그 흔적이 애잔하다. 다리가 좋지 않으시다. 시골에 사는 노인들은 대부분 다리가 편치 않다. 주로 퇴행성관절염이 원인이다.

“병원은 가보셨어요?”

“나무가 못을 박아 노믄 녹이 안 쓰요? 다시 수술을 해얀디. 아들들은 시방 바로 병원 가자고 난리를 쳐부는데.”

“제가 보니 붓기도 그렇고 엄니 이거 빨리 하셔야 해요. 겨울까지 가면 안 돼요. 그냥 자식들 말씀을 들으세요.”

“고치 숭그노코 콩도 숭그노코. 누가 해줄꺼요?”

그렇다. 누가 해줄 것인가. 그리고 막상 고추와 콩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혼자 병원 가지 말고 아들 불러서 가시라 말씀드렸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못 그라요. 일하는 사람을 그라믄 못써요. 저거는 전화하라고 해싼디 뻔히 직장서 소리는 소리대로 들음서 넘 눈치 봐감서 와야는데, 저는 그러라고 싼디 그냥 버스 타고 나가요.”

엄니는 직업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뭔 볼일이 깊어 이리 한결같단 말인가.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 권산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해 웹디자인과 인쇄물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부업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7년 전 전남 구례군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디자인 일을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아버지의 집> <맨땅에 펀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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