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1:41 수정 : 2013.07.04 14:08

지하철 이태원역 3번 출구 계단이었다. 지친 걸음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지친 걸음으로 올라오는 남자가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서로를 알아보고 당황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우연히 마주친 두 남자는 지하철역 출입구 계단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서로에게 “여기는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태원 연대기’ 취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고, 그는 퇴근해서 귀가하는 길이었다. 이렇게 지하철역 계단에서 우연히 그가 이태원 주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이번에는 미리 시간을 정해 이태원역 3번 출구에서 김민하를 만났다.

현재 미디어비평 웹진 <미디어스> 기자인 김민하는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텍스트 펴냄·2009)의 저자이며, <안철수 밀어서 잠금 해제>(메디치미디어 펴냄·2011)와 <우파의 불만>(글항아리 펴냄·2012) 등의 공저자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을 거쳐 진보신당에서 상근자와 정책위원을 역임한 정당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개하니 무게감 있는(물론 그의 체구는 무게감이 있다) 중년 남성을 연상할 수 있지만, 20대 시절부터 이른바 ‘키보드 워리어’로 출발해 트위터 활동가로 종횡무진 활약해온 30대 초반의 청년이다(물론 그의 외모는 중년의 기운을 품고 있다). 동시에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나 아직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밴드 ‘야채인간’의 기타리스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컴퓨터 게임과 만화와 생을 같이해온 ‘오타쿠’이다.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은 네댓 살 무렵 이모가 사준 게임기 대우제믹스에서 비롯됐다. 김민하 어린이는 게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 김민하 어린이를 어여삐 여겨 현대컴보이를 사주셨지만, 이것은 아버지의 최초이자 최후의 게임기 선물이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4~5학년 때는 당시로선 최첨단 컴퓨터인 486DX가 있는 친구네를 수시로 방문했다. 목적은 게임을 하기 위해서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인 김민하는 서로 겨루어 이기려는 경쟁 게임보다 혼자 하는 롤플레잉, 시뮬레이션 게임을 더 좋아한다. 사람을 경쟁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사회에 반대하는 진보정당 당원이기 때문인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게임에 입문해서 성장한 김민하 학생은 만화에도 빠져들었다. 일본 만화 <건담> 팬인 민하씨는 얼마 전,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들>을 소재로 정치 칼럼을 쓰기도 했다. 사실 대중소설, 상업영화, 애니메이션에는 다양한 코드가 숨겨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정신적 유산이 고구마 줄기처럼 뻗어가며 서로를 연결해놓고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주인공 퓌라모스와 티스베의 신화에서 나왔음 직한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모든 세계인이 알게 되었고, 아서왕과 마법사 멀린의 관계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오라클(메리 앨리스)의 관계로 변주되어 관객의 두뇌에 이식되고 있다.

정치가 맺어 준 이태원 인연

수원 토박이인 민하씨가 이태원 주민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다양한 문화와 비주류의 취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목적 때문이 아니라, 직장 출퇴근 문제 탓이었다. 당시 여의도에 있던 직장, 그러니까 진보신당 중앙당사가 홍익대 근처로 이전하면서 도저히 출퇴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이태원과의 인연도 어떻게 보면 정치가 맺어준 셈이다. 적당한 거처를 알아보던 중에 후배의 집을 방문했는데,

부담 없는 수준의 보증금과 월세라는 조건에 살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구할 수 없는 집을 발견한 민하씨는 후배를 쫓아내고 이태원으로 이사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집은 그만큼 감수해야 할 조건도 구비하고 있었다. 이 옥탑방은 ‘외부와 단절되지 않은’ 열린 집이다. 인터넷과 친밀한 집주인을 닮아서인지 집의 형태와 구조도 아주 개방적이다. 벽체는 어설프고 누가 망치로 두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구조물이다. 지붕 없는 집보다 낫겠지만, 스스로 ‘움막’이라 부르는 이 집에 사는 덕에 장마와 태풍이 찾아올 때면 요란한 자연의 호통소리와 숨소리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다행히 우화 <돼지 삼형제>의 첫째와 둘째 돼지 집과 같은 운명은 맞지 않았다. 의외로 튼튼했다.

민하씨 역시 주민이 되기 전, 이태원에 대한 인상이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국 음식을 먹으러 온 이태원은 위험하고 유흥의 극단을 달리는 곳으로 보였다. 주말에 이태원 가는 사람들은 꼭 길거리와 화장실에서 구토해야만 할 것 같았다. 주말 밤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은 선행을 감추려 으슥한 골목을 찾아 비둘기 모이를 뿌리곤 한다. 술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묘약임을 확인하지만(술의 신 바쿠스는 쾌락과 다산의 신이기도 하다는 사실!), 대개 다음날이면 기억하지도 못할 말을 방금 전까지 떠들며 술을 마신 청춘들이다. 아침에는 간밤의 음주를 후회하며 한껏 우울해하다가 이내 극복해낸다. 그 무렵 도시의 비둘기들은 그들의 선행에 감사하는 뜻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배를 채운다. 이태원에서도 같은 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및 장르분과장,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최근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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