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1:22 수정 : 2013.07.05 19:27

우리 사회의 욕망 계단은 더 까마득하고 좁아졌는데, 효리는 그 욕망의 부질없음을 폭로하며 계단 위에서 성큼성큼 내려오고 있다.한겨레 정용일
아이돌의 역사는 이제 ‘구멍 난 서사체’(Syntagmatic Gap)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빼곡한, 그러나 반복적인 역사를 갖추고 있다. 1990년대 말 이래 아이돌의 생성과 소멸은 매우 유사하고 반복적인 패턴이어서 특정 기간의 아이돌을 모른다고 해도 아이돌을 말할 수 있고, 누군가 아이돌사의 전체를 안다고 해도 특정 아이돌의 어떤 면모는 전혀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HOT’에서 시작해 ‘B1A4’에 이르는 아이돌의 서사는 매회 <전국노래자랑>(KBS)의 출연자들이 다른 듯 닮은 것마냥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이돌 역사 초기, ‘핑클’과 ‘SES’의 역사는 그래서 여전히 모든 여성 아이돌의 존재에 깊은 영감을 제공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첨예한 것이었다.

SES는 동경했지만 쉽게 알지 못한, 그러나 확실히 세련되다고 여기던 일본 소녀그룹의 한국적 구현이었다. 사실상 걸그룹의 효시인 SES는 댄스와 보컬을 모두 섭렵한 모습이었고, 양갈래 머리와 과하지 않은 힙합풍의 조화를 통해 전에 없던 뭔가의 새로움을 ‘확실히’ 어필했다. 후발주자 핑클은 한국 남성 소비자들이 대중문화에 투영하는 ‘페이버릿 여성’의 모습을 최대한 다채로우면서 익숙하게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초기 핑클은 언제나 화이트칼라 의상에 긴 생머리를 고수했다. 그것은 ‘순수’를 표상한 가장 노골적 유혹이었다.

여기에 다소 이질적인 이효리가 있었다. 지금이야 ‘천하무적 이효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당대 대중문화의 최고 지배자이지만 당시 이효리는 확실히 애매한 포지션이었다. 순백의 여신을 구현하기엔 다소 어두운 피부 톤이었고, 앙증맞은 안무를 소화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파워풀해 보였다. 섹시와 큐티를 강조하는 힙합의 캐릭터로 대세에 부응하긴 했지만 유리, 채리나 등 겹치는 이미지의 스타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하는 처지이기도 했다.

화려한 SES와 핑클의 시대가 끝나고 아이돌사에도 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이효리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 본 이는 그래서 많지 않았다. 당대를 지배한 압도적 외모도 아니었고, 옥주현과 바다처럼 보컬로서 성공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눈웃음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거친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헤쳐나가기엔 솔로 이효리는 너무 불안한 ‘입지’였다. 하지만 이효리는 아시다시피 놀라운, 그리고 역대 아이돌사를 통틀어서 가장 대단한 ‘반전’을 만들어냈다. 2003년 8월, 이효리의 솔로 데뷔곡 ‘텐미닛’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 그 충격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못지않았다.

바야흐로 ‘기승전 효리’의 정국이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을 지배했다. 2003년 이후 몇 년간 이효리의 위상은 해마다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의 세대에게 이효리는 욕망의 ‘실현’과 ‘표상’ 모두에서 기준점이 되는 존재였으며, 한국 사회의 ‘걸 파워’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그녀의 이름은 환영처럼 동시대에 군림했다. 표절 논란과 연기 실패로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이효리의 매체 이미지 과포화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됐다.

그런 이효리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놀랍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뛰어난 몸매의 소유자이자 유명 광고 모델’이던 전지현 역시 그렇게 사라졌고, ‘최고의 가수이자 연기자’였던 엄정화 역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활동 반경이 줄어들어 갔다. 관성대로라면 이효리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했고, 더욱이 그가 아이돌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역사의 마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효리는 전혀 다른 ‘기표’가 되어 다시 대중문화의 중심에 복귀했다. 이효리는 ‘동물 보호’라는 비교적 덜 정치적인 선의의 이름으로 호명되더니 언제부턴가 ‘투표 독려’를 통해 정치적 아이콘으로 부상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정도 수위의 활동이 뭐 그리 대단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 연예 산업의 현실에서 이효리의 행위는 흡사 ‘프라다를 입은 활동가’ 같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효리는 이상과 삶의 거리를 끊임없이 좁혀가는 대단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지상파 예능에서 채식을 공공연히 말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광고 거부 의사를 밝히며, ‘성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소재로 토크하는 여성 연예인은 현재 이효리가 유일하다.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무수한 스타들이 위치를 바꾸고, 존재를 변화하며, 자리를 지켜오고, 명성을 유지했지만, 이효리처럼 극적 변화를 택해 위치와 존재를 아예 재사유화하는 경지로 나간 경우는 없었다. 복잡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속에서 스타란 지위는 단일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특정한 소비 문화적 맥락과 일정한 행동 유형 안에서 머물러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이돌 출신이라는 무시당하기 쉬운 존재에서 출발한 이효리는 변덕스러운 대중의 기호를 완전히 사로잡으며 까다로운 연예 권력의 전부를 점령했다가, 슬며시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거기서 빠져나가며 개인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는 거의 유일한 스타가 되어가고 있다. ‘미스코리아’의 비애를 들려주는 이효리는 이제 음악 순위 프로그램 무대에 서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며 ‘귀농’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효리의 이런 변화는 우리가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효리가 이제 완전히 전복되었음을 확인시킨다. 이효리는 판에 박힌 아이돌의 서사에서 탈피해, 자신이 누리던 현상을 스스로 허물고 보편적인 정서의 30대 중반으로 ‘귀환’했다. 모두가 이효리처럼 되고 싶어 하던 우리 사회의 욕망 계단은 더 까마득하고 좁아졌는데, 효리는 그 욕망의 부질없음을 폭로하며 성큼성큼 내려오고 있다. 천하무적 이효리라는 초실재적 존재는 이제 없지만, 언제든 부담 없이 소주 한잔 하며 세상사를 논할 수 있을 것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친구’로, 그도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아니 그 현상의 동세대들이, 그것도 아니면 화려한 인기 뒤에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을 애꿎은 일로 달래는 무수한 아이돌만이라도 보톡스가 없어도, 명품백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좀 깨달으면 좋겠다. 이효리처럼.

김완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 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 화연대에서 변두리 이슈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 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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