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0:32 수정 : 2013.07.04 14:14

지금도 온라인으로 업데이트가 진행되고 있는 <회의 주의자 사전>(로버트 T. 캐럴 지음·한기찬 옮김·잎파랑 펴 냄)은 700장이 넘어가는 둔기에 가까운 책이다. 미국 캘 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시티컬리지 철학과 교수인 캐럴에 의해 온라인에서 편찬되기 시작한 사전인데 사이비 과학, 미신, 점술, 대체 의학, 오컬트, 근거 없는 낭설, 음모론 등 에 대해 회의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이성 관점에서 서술하 고 있다. 충분히 의심스러운 요정(Fairies)이나 엑토플라즘 (Ectoplasm) 같은 항목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항목에 올라 있다. 한국에서는 일상적 의 료 행위인 침술(Acupuncture)은 물론, 성격·적성 검사에 많이 쓰는 애니어그램(Enneagram) 역시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의심스러운 대상으로 묘사된다. 자연 혹은 자 연적인 것이 인간에게 좋다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속설 에 대해서도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궁극적으 로 볼 때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은 자연적인 원자, 분자, 원소 혹은 물질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함유하고 있지 않다. 따라 서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자연적이라면, 어째서 자연요법 추종자들은 자연적인 것을 사용하는 일을 놓고 그렇게 소 동을 피우는 것일까? 이런 강박감은 불건전해 보이지만, 덕 분에 어떤 것이 정말 좋거나 안전하거나 건강한 것인지 여 부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이 ‘자 연적’이라는 사실만 확인하면 그것의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각하지 않는 일 역시 자연스럽다.”(459쪽 ‘자연적’(Natural) 항목)

과학이 종교나 권력에 종속된 시절이 있었다. 연구의 한계는 진리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 세상의 사정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비록 진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가 자신의 주장 을 꺾고 재판정을 나온 갈릴레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그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수 없이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선조 과 학자들이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목숨 을 잃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은 정치적 혁명만큼 인 류 해방에 기여했다. 신의 목소리를 대리한다는 성직자들 과 신으로부터 권위를 이양받았다는 왕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확실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 겠는가? 사전에는 이런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칼 세이건의 표현을 빌리면, 과학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다. 과학은 우리 주위의 세계에 빛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미신과 두려움 너머, 무지와 망상 너머, 마법에 홀린 선조들의 생각 너머에 있는 것을 보도록 해준다.”(654쪽 ‘과 학’(Science) 항목)

비과학적 주장과 믿음

하지만 요즈음의 상황은 목숨을 걸고 계몽의 횃불을 들어 올린 이들이 보기에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일례로 1997년 미국 아이다호에서 한 중학생이 일산화이수소가 위험한 물질이란 것을 알리고 사용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 은 적이 있다. 화상을 일으키고, 금속을 부식시키고, 강한 중독성이 있으며 지형 침식과 온실효과까지 일으키는 이 위험한 물질이 정부와 기업 등의 편의에 의해 공업용 냉각 제, 원자력 발전, 발포스티로폼 제조, 방화제, 심지어 음식 에 사용된다고 했다. 50여 명을 상대로 진행된 이 서명 요

청은 43명의 서명자와 6명의 판단보류자, 1명의 상식인을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즉 50명 중에 일산화이수소가 ‘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학생의 진짜 연구 제목은 ‘인간은 얼마나 속이기 쉬운가?’였다. 이 말은 2013년 만우절에 플로리다의 한 라디오 방송사에서 반복되었는데, 덕분에 지역의 수도 당국은 성난 시민들의 항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일산화이수소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위험한 화합물이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어떤 어른의 책이 건강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중이다.

과거 계몽의 콘셉트는 어쩌면 간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기존 낡고 잘못된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등을 돌릴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그동안 과학이 끝없는 발전을 거듭해왔음에도 비과학적인 주장이나 믿음은 일소되지 않았다. 아니 일소되기는커녕 사이버 네트워크를 통해서 전보다 더 무성하게 번성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비행기가 날고, 화성에 로봇을 보내고, 사람들이 스마트폰 ‘중독’에 빠지는 이 과학의 시대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떤 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할 이 어긋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중첩되어 있다. 먼저 과학적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감과 피로감의 누적이 존재한다. 과학은 기존 사람들이 믿어오던 신념 체계, 생활 습관, 사고방식 등을 교정하려 했다. 근대 과학 혁명이 벌인 ‘과학적 엑소시즘’을 통해 많은 것이 이성적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옳다는 이유로 익숙한 무언가를 버리라고 종용당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갈릴레오는 신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이성을 꺾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어떤 이들은 과학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꺾고 돌아서서는 ‘그래도 신은 존재하신다’ 같은 볼멘소리를 했다.

계몽적 과학에 대한 저항감

이런 피로감과 저항감에 모종의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은 근대 이후의 과학이 걸은 들쭉날쭉한 행보다. 과학은 생활 수준과 생산력의 엄청난 발전에도 기여했지만, 무기 체계의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도 혁혁하게 기여했다. 전근대의 전유물로 여기던 야만이 과학을 만나 일으킨 상승작용은 아우슈비츠와 원자폭탄으로 대표되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스케일의 파국을 선사했다. 인간의 살상력은 진리를 위한 투쟁 끝에 밝혀낸 둥그런 모양의 행성인 지구를 위협할 수 있을 만큼 비대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발견된 지식에 대한 성마른 확신과 적용은 황당하고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가령 20세기 초반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뒤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라듐을 사용한 상품이 출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치약, 초콜릿, 좌약, 의료용품, 시계, 콘돔, 자양강장제 등이 아무런 문제 없이 시판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방사선을 방출하는 라듐은 발견자인 물리화학자 마리 퀴리를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유발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라듐을 금지하게 하는 계기가 된 철강사업가이자 골프선수 에벤 바이어스의 죽음은 유명하다. 의사의 권고로 라듐이 들어 있는 자양강장제를 매일 마셔대고 유통사업에 직접 뛰어들어 광고 모델까지 자청한 그는, 뼈와 관절이 분리되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마리 퀴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큰 원인 역시 검소하게 살던 그녀에게(라듐은 당시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미국의 한 학회에서 선물한 라듐 1g이었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한 과학(자)의 부도덕과 부주의도 대중의 불신을 부채질했다. 2000년대 이후 ‘웰빙’ 열풍을 타고 끊임없이 소개된 물질 대부분은 광고에서 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코엔자임Q10, 콜라겐, 적정량 이상의 비타민, 은나노, 각종 호르몬 등은 복용이나 도포로는 효과가 없거나 미미하며, 과도할 경우 부작용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업과 연구자, 다른 과학자들의 묵인 속에서 상품화된 이런 성분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광고되고 팔려나갔다. 황망하게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살균제 사고나 각종 의료사고와 떠넘기기 공방, 연구 성과에 대한 조작이나 표절 논란, 최근 불거져나온 원전 부품과 관련된 비리 커넥션 등은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더욱더 회의적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과학과 사람 사이에 생겨난 불신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이 사이비과학 혹은 의사과학(Pseudoscience)이다. 의사과학 대부분은 기존 과학과 과학자들이 부도덕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또 과학이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얼마나 무능한지 폭로하고, 과학의 유명한 과오를 끄집어내어 강조한다. 이렇게 ‘주류과학’

을 무력화(?)하고 나면, 자신의 주장이 주류과학의 무능함과 부패를 딛고 이룩한 거대한 발견이라는 주장을 한다. 의사과학의 창시자와 신봉자들은 자신의 어떤 특별한 경험에 압도되거나, 자신의 믿음이나 신념에 경도되어 있는 상태에서 모든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전형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 또 주류과학에 실망하거나 추방당한 일부 전·현직 과학 연구자나 교육자들이 의사과학의 창시자나 추종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의사과학은 음모론의 발생과 유사한 구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현대과학이 설명하지 못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 또는 설명하고 있으나 사람들이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의 틈새를 파편적 사실과 뒤섞인 허구를 통해 채운다. 의사과학 대부분이 보여주는 논증 구도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말한 ‘차고 안의 용’과 흡사하다. 어떤 사람이 자기 차고 안에 용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차고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 용은 투명해서 안 보인다”고 말한다. 그럼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발자국을 보자고 말하자 이번에는 “이 용은 공중에 떠 있다”고 한다. 적외선 탐지기로 살펴보자고 하자 “이 용이 뿜는 불은 그것으로 안 잡힌다”고 대꾸한다. 페인트를 뿌려보자는 의견에는 “이 용은 형체가 없다”고 둘러댄다. 아마 일주일이 지나도 이 용을 식별할 수 있는 뾰족한 수는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차고 주인이 계속해서 여기에 용이 있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면 가장 현명한 선택은 집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며 ‘세상엔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지’ 하며 용에 대한 생각을 마치는 것이다.

과학과 일상의 괴리

하지만 의사과학의 문제는 음모론보다 좀더 복잡한 면이 있다. 프리메이슨에 집착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지만 은나노, 애니어그램, 대체의학은 일상에서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기본 과학 상식만 알아도 해결되는 문제가 영원히 순환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켜고 잠들어도 질식하지 않는다거나, MSG(글루탐산일나트륨(Monosodium Glutamate))가 연금술이 아닌 자연물에서 추출된 것이라거나, 인간이 갑작스럽게 자연 상태에 놓이게 된다면 그동안 인공적인 과학기술의 힘으로 막아오던 수많은 독소와 미생물이 순식간에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등의 사실이 여전히 의문시된다. 다시 한번 현대과학(상식)의 수호자들은 MSG를 사용하는 식당을 소리 높여 고발하는 사람들의 뒤에서 볼멘소리한다. ‘여러분, 제발 기초과학 교육을 정상화 합시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 과학인지를 두고 벌이는 고차원의 싸움을 접어두고 바라본다면, 수상해 보이는 치료를 받으며 효과 없는 영양제를 입안에 털어 넣는 이들이 겪는 어떤 인과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의사들에게 불만을 터트리는 많은 이유에는 과잉진료나 의료사고, 몇몇 의사들의 태도에도 기인하지만, 흔히 제기되는 불만은 의사가 내리는 처방 때문일 것이다. 실컷 증상을 설명하고 이곳저곳을 진찰한 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범 답안은 대부분 “스트레스 받지 말고, 잠 많이 자고, 식사 잘 하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모범은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채택되는 우리의 답안은 “선생님, 제가 그럴 수 있으면 병원에 오지 않았을걸요”라는 또 다른 볼멘소리다.

오늘날 과학은 생산과 소비 면에서 여전히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의 일상에서 삶을 돌보는 지혜로서는 중히 활용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구비를 쥐고 있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과학의 발전 방향은 더 쉽게 죽이고, 더 많이 버는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은 공유되기보다는 독점되었고, ‘우리는 한다, 왜냐하면 할 수 있으니까’를 넘어서는 ‘이념’은 딱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문제는 ‘무엇이 우리들의 문제인가?’라는 질문 자체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넓고 문제는 많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글 최태섭 문화평론가. 팔자에 없을 것 같던 글과 말을 업으로 삼은 이후 매일같이 ‘멘붕’(멘탈붕괴)에 빠져 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가지 평등주의> 등을 공저했으며, 현재 ‘잉여’를 주제로 책을 집필 중이다. 성공회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과정에 있다. 이런저런 매체에 글을 쓴다. 장래 희망은 먹고살기.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