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3 16:54
수정 : 2013.07.0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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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연구자들의 공동체인 ‘수유너머R’ 회원들이 지난 5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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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 두려운 것
2011년 어느 가을밤, 미국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후 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일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은 모 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일본 잡지 <현대사상>의 편집장이 던 이케가미 요시히코 선생의 말과 표정을 좀처럼 잊을 수 없다. 한 패널이 물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원자력발전소(원 전) 없이 현재의 삶을 지탱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 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우리는 지금 원전 없이 살고 있습 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참 단순한 답변이었는데,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어떤 불가피성의 논리가 단번에 박살났 다. ‘아, 원전 없이 살 수 있구나!’
그는 짧은 영어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정말 걱정 스러운 것, 정말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전기가 부족한 상황이 아닙니다. 밤이 조 금 어두운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에어컨과 전기난로 를 켜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20~30년 동안 우리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내부 피폭 때문에 병을 앓다가 죽어갈 겁니다. 숨 쉬는 공기와 먹고 마시는 물과 음식을 통해 아이들은 ‘암’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모두 1960년대의 원전 반대 싸움에 패배하면서 우리가 저지른 일입니다.”
수만 명의 생명을 지불해서 얻은 너무나 비싼 깨우침이 었다. 그의 말 그대로다. 정말 두려운 것은 전기가 부족한 상 황이 아니라 그 부족을 해소하겠다며 우리가 아무 일이나 저 지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편리 한 시대이면서 가장 위험한 시대이다. 인간의 창의력을 몽땅 돈과 편리에만 바칠 뿐, 도무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 없다. 후쿠시마의 원전이 녹아내리며 그 무섭고도 아픈 진실을 전할 때에도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원전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가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 었다. 이런 게 바로 두려운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 데거가 ‘전진하는 무사유의 발걸음’이라고 불렀다. 아무 성찰 없이 계산기만 두들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2. 밀양식 보수주의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밀양’은 사유 없는 전진에 대 한 일종의 비상 브레이크라고 할 수 있다. 무려 8년간 경남 밀양의 노인들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도 발전주의 의 바짓가랑이를 놓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밀양 송전탑, 그 7년의 전쟁>에서 나는 그들을 처음 보았다. 칠순·팔순 의 노인들이 마치 파수꾼처럼 매일 지팡이를 짚고 높은 산 을 오르고 있었다. 젊은 용역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이야기 를 하다 엉엉 우는 노인도 있었다. 용역들이 나무를 베려 할 때마다 자기 몸을 톱날 앞에 갖다 대던 사람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그들도 그것을 재산이나 건강이라고 말했 다. 송전선이 지나가는 땅이 강제수용되었는데 보상액이 형편없었다. 말 그대로 재산이 반의 반 토막이 났다.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선이 마을을 관통하는데 주민의 건강 에 대한 고려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전력은 마치 그 땅이 텅 비어 있기라도 하는 양 마구 밀어붙이기만 했다. 노인들 이 여기에 저항한 지 무려 8년이 흘렀다. 하지만 지난 8년의 싸움은 노인들로 하여금 사태의 더 깊은 곳을 보도록 했다. 아니, 지난 8년간 이들이 벌인 싸움은 우리로 하여금 사태 의 더 깊은 곳을 보도록 해주었다.
지난해 밀양을 처음 찾았을 때 나는 갈등이 보상의 ‘미 비’가 아니라 ‘불가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밀 양의 노인들은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한전은 여전 히 ‘적은 보상’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뒤늦게 보상액 을 대폭 올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태의 초기에만, 그것도 일부 젊은 사람들에게만 통할 수 있는 해법이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고병권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강의하고 있다. 마르크스, 니체, 스피노자 등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몇 편 의 글을 써왔다. 최근 펴낸 책으로는 <생각한다는 것>,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