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1 13:42 수정 : 2013.06.12 10:47

여린 봄, 빗방울이 주말 내내 먼지를 뒤집어쓴 계단의 몸을 씻겨주었다. 지난 며칠 동안 계단을 분주히 오간 사람 들과는 전혀 다른 옷차림의 중년 남녀들이 계단을 차례차 례 내려왔다. 보광동과 이태원동을 가로지르는 이태원로는 강물처럼 버스와 자가용을 실어 날랐다. 월요일이 돌아오 자 출근길로 변신한 54칸짜리 계단은 인공폭포처럼 이태 원로를 향해 사람들을 방울방울 흘려보냈다.

이태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54계단은 상징물이 되기에 는 다소 부족하고, 그렇다고 여느 계단처럼 지나치기엔 살 짝 아깝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 앞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이 잠실 롯데백화점 지하의 모조 분수 앞에서 잠시나마 낭 만을 즐기듯이, 고동색 목재로 된 옷을 맞춰 입은 54계단를 보고 있으면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혹자는 이태원로에서 솔마루길을 향해 오르 는 이 계단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지로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하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밤안개에 취 해 산책을 나섰다가, 동편 하늘을 물들이는 보랏빛에 이끌 려 빨강과 파랑이 교차하는 네온사인 간판이 번쩍이는 ‘24시 장작 불한증막 사우나’ 앞에 이른 적이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오프닝 시퀀스를 촬영한 곳이 실은 부산의 중앙동 40계단임을 알면 그 혹자는 실망할지 모른다.

이태원의 특징은 계단이다. 54계단, 63계단, 87계단을 포함해 이 지역에 설치된 크고 작은 계단들은 이태원의 상징물이 되었다. 54계단, 가파르고 오래된 87계단, 54계단과 63계단 사이에 그려진 골목 벽화(사진 왼쪽부터).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침이 오면 계단은 삶터

출근시간대가 지나고 빗방울도 멎은 54계단을 보며 좀더 오래된 영화 속 중동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아랍 부족 연합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자 지역 부족장들이 모여들어 북적북적하던 회의장의 혼란 상, 그리고 부족장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간 후 텅 빈 회의장 에 무력감이 감싸앉는 장면은 나이 어린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광란의 주말이 지나간 평일 오후, 이태원 54계단의 풍경은 평화롭다 못해 적막했다.

매주 반복되는 이 모습을 계단 정상부 옆에 있는 무대 의상 상점 창으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 번 마주 친 마네킹 여인들이다. 그녀들에게 인사하고 슬쩍 가게 안 을 들여다보니 한 중년 여성이 의자에 앉은 채 곤히 자고 있 었다. 마치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제자 골트베르크의 숙제 를 대신해준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Variation BWV 988)>을 들으며 잠에 빠져든 어느 귀족처럼 말이다. 주인의 고단한 다리 사이에 웅크린 재봉틀도 함께 졸고 있 었다. 그 옆에 있는 오래된 세탁소의 다리미들은, 바흐의 <커피 칸타타>(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BWV 211)>를 듣고 잠을 쫓아냈는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애들은 놀러 오지만 우리한텐 그냥 일터여.” 그러더니 세탁 소 주인인 이 나이든 부부는 장마철이면 계단이 어떻게 변 하는지 설명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및 장르분과장,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최근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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