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1 10:40 수정 : 2013.06.12 10:47

김현은 저서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과지성사)에서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문학은 권력의 지름길이 아니다. 문학은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한다. 문학을 함으로써 출세하거나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왜 써먹을 수 없는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가? 그는 말한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우리에게 유용한 것, 가령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김현의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정전이 되면 진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고, 컴퓨터도 할 수 없다. 무기력하게 잠이나 잘 수밖에 없다. 유용한 것에 우리가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역설적으로 그것이 우리를 보이지 않게 억압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유용하지 않는 것에도 가치가 있다

김현의 주장, 즉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억압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세계 개조에 대한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통해 이를 주장하고 있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다. 유용한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될 수 있는 김현의 논증은 부당하다. 전통적인 논리의 규칙에 의하면, 전제가 모두 부정명제인 경우에 우리는 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김현의 논증은 ‘만약 그것이 유용하다면, 그것은 인간을 억압한다. 그런데 문학은 유용하지 않다. 따라서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이 논증은 ‘전건 부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증이 부당해도, 그가 주장하는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 함축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이 논증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결론을 정당화하지 못할 뿐이다. 비록 그의 논증이 부당하더라도, 나는 그가 주장하는 결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김현이 제시하는 논증을 ‘문학은 써먹을 수 없는 것, 즉 무용(無用)한 것이다. 무용한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면, 그의 논증은 타당하다. ‘무용한 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대우(Transposition) 규칙에 의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유용한 것이다’라고 고쳐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유용한 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 만약 유용한 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라면, 유용한 것은 반드시 인간을 억압하는 것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라면, 유용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되지 않는다. 즉 유용한 것 중의 어떤 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된다.

프랑스 문학을 연구한 김현에게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혜시(惠施)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가죽나무의 예를 들면서 장자를 공박한다.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댈 수 없고, 가지가 비비 꼬여 자를 댈 수도 없는 큰 가죽나무를 목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혜시는 장자의 주장이 마치 이 큰 가죽나무 같다고 비꼰다. 장자의 주장은 가죽나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혜시의 공박에 대해, 장자는 좀더 큰 시야를 가지라고 한다. 오직 쓸모로만 판단하지 말라. 쓸모와는 구분되는 다른 차원이 있다.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벌판에서 그 나무를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고, 그 그늘에서 유유히 누워 자보지 못하는가.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쓸모 없다고 괴로워한단 말인가.” 이런 장자의 주장처럼 쓸모나 유용성과는 다른 차원이 있다. 그런 차원을 무시하고 단지 유용성만 생각한다면 유용하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게 된다. 따라서 가치 있는 것들은 유용한 것이며, 오직 유용한 것만 가치 있게 된다. 그러나 장자는 유용하지 않은 것도 다른 관점에서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위기는 이런 장자의 주장을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고 할 수도 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김영건 서강대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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