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6 23:49 수정 : 2013.05.07 10:52

김미경이라는 인성산업(Personality Industry) 혹은 자기계발 업계의 스타 한 명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한때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그 업계의 스타들 역시 그랬듯이 말이다. 윤은기나 ‘신바람 박사’ 황수관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공병호나 구본형 같은 유명 자기계발 텍스트의 작가들은 어느덧 뇌리에서 잊혔다. 그렇지만 이런 새로운 스타들이 뜨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이 개척하고 유행시킨 자기계발이라는 독특한 ‘이데올로기’는 당분간 번창할 것이다. 김미경은 1990년대를 전후하여 폭발한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의 후광을 업고 등장했을 뿐이다. 그녀가 재기하거나, 아니면 그녀를 뒤이을 또 다른 스타가 조만간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김미경식 자기계발, 혹은 자기모멸

사실 나는 그녀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느 날 TV 방송에서 그 분야의 달인이라기엔 조금 어눌하고 억지스런 어투로 어떤 여자가 강연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녀의 어투는 적잖이 구차하게 들렸고, 청중의 반응을 끌어내려는 그녀 특유의 야단치는 듯한 말버릇 역시 거북했다. 자기계발 강연계 달인들의 강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나의 생각에 기꺼이 동의해줄 것이다. 차라리 <힐링 캠프>니 <무릎팍도사>니 하는 자기계발 담론의 얼개를 빌려온 TV 예능 프로그램이 그녀보다 낫지 싶었다. 그러다 뒤늦게 그녀가 망신당하고 자리를 뜬 연후에야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가 어지간했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그 역시 내겐 그다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런 사람들로 꼽자면 한참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한 만큼 거두리라’는 이런 개인 성공신화는 1970년대 후반까지는 그다지 대세가 되기엔 어려웠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이룬 성과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이지 평범한 노동자에겐 코미디 같은 소리기 때문이다. 복잡한 산수를 동원해 야구 선수 한 명의 몸값을 결정하는 저 유명한 연봉 계약은 보통 노동자 삶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이야기였다.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한 그 동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개별 기업에 따라 약간 차이는 있어도 얼추 비슷했을 것이다. 자동차 회사에서 조립공으로 일하는 노동자라면 어느 직장에서 일하든 어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고 짐작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연공서열제 같은 임금 체계를 가진 나라에서 임금은 회사에 충성심을 보여주는 근속연수에 따라 차곡차곡 오르는 게 상식이었다. 내년에 한 호봉이 올라 그만큼 임금이 오를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이제 눈 녹듯 사라진 먼 옛날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 전설의 세계에 사는 몇몇 집단에게는 ‘철밥통’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들을 향한 질투와 반감은 안정된 노동의 세계를 향한 선망이자 ‘불안정 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불안한 생활에 대한 공포와 염려가 투영된 것일지 모른다. 그런 선망과 질투로 뒤범벅된 이상한 세계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데는 무엇보다 자기계발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먼저 자기계발이라는 ‘윤리적’ 이데올로기가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노동력의 구성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대학을 진학하고 그 이후에 취업이란 경쟁을 거치고, 또 그렇게 얻게 된 직장이 서비스 부문에 가까운 세상에서, 노동자는 오직 ‘자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 그것은 외판원들의 이데올로기로 오랜 세월 머물러 있었음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모두의 이데올로기이다. 모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혹은 졸업하고 나서도 자신의 경력을 형성하고 자질을 빚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자기계발은 이제야 온전히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만한 꼴을 제대로 갖추게 된다. 그리고 김미경 같은 강사가 비로소 뜰 수 있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서동진 문화평론가. 계원디자인예술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저서로 <록, 젊음의 반란>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디자인 멜랑콜리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지금 여기의 진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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