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4 14:47 수정 : 2013.04.04 18:09

봄이다. 올해도 농사짓자! 나는 전업농부가 아니다. 귀농한 것도 아니다. 책 읽고, 책 쓰고, 세미나하고, 강의하는 걸 일삼는 인문학 연구자다. 농사라야 겨우 5년째 텃밭에 재미 붙여 10평(33㎡) 남짓 옥상 텃밭과 14평(46㎡) 되는 한강 노들섬 시민 텃밭을 경작하는 풋내기 도시농부다. 이런 내게도 농사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만큼 농사는 힘이 세다.

2008년 첫 농사, 거둬 먹은 기억은 없다

농사를 시작한 건 2008년 봄이다. 어떤 계기로 농사에 관심이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봄날 서울 남산 자락의 ‘연구공간 수유너머’(인문학 연구공동체) 주차장 자투리땅이 있고 거기에 상추씨를 뿌리고 있는 내 모습이 기억난다. 볼에 와 닿는 햇살과 손에 감기는 흙이 무척 따스했다. 연구실 생활이 왠지 서먹하고 막막하게 느껴진 탓일까? 연구실 덩치는 날로 커져가지만 그 안에서 내 자리가 없다는 허전함, 나만의 특이성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뭔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한창 붐이던 사주 명리학을 공부했다. 내 사주의 4성 중 ‘관성’, ‘인성’, ‘재성’은 무난히 돌아가는데 ‘식상’이 약하다고 했다. 식상이란 내 안의 것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 즉 생산 활동과 표현 활동이 이에 해당한다. 확실히 말문과 글문이 막힌 느낌이고, 표현하고 생산하는 활동이 위축돼 있는 것 같았다. 농사로 부족한 식상을 보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씨를 뿌리고 기르는 농사는 창조와 생산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어릴 적 그토록 싫어하던 농사일이 문득 그리워지고, 씨앗이 흙에 묻혔다가 싹을 틔우는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국문학 전공.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아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을 썼고, 슬라보이 지제크의 책을 여러 권 번역했다.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의 융합에 이론적 취향이 있다. 요즘 미셸 푸코의 후기 통치철학을 연구 중이다. 책 읽고 쓰는 일이 업이지만 현장에서 몸 쓰며 활동하고 거기서 공부거리를 찾는 스타일이다. 거리예술·농사·목공·살림에 약간씩 소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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