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4 14:31 수정 : 2013.04.04 14:31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같은 수준의 인문 교양을 갖춘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A는 변호사고, B는 대학 중 퇴(고졸)의 백수다. 고학력자가 넘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 든지 있을 수 있는 조합이다. 하지만 사회적 시선은 A와 B 의 교양을 전혀 다르게 표현할 것이다. A는 ‘교양인’, B는 ‘잉 여’. 두 사람의 교양 수준이 높을수록 평가는 더욱 양극화 될 가능성이 크다. A는 ‘르네상스형 천재’, B는 ‘밥은 먹고 다 니냐?’

잉여가 오늘날 주체화 양식의 하나라면, 교양은 지식 생산 양식의 하나다. 평범한 대학생이 인문서를 읽으며 교 양을 쌓는 것은 마치 봉지에 든 조리퐁 개수를 세는 것처럼 잉여적인 짓으로 여긴다. 어느 유명한 자기계발 ‘멘토’는 자 기계발서를 읽지 않고 인문서만 읽는다는 청년에게 ‘시건 방 떨고 있다’고 일갈한 적이 있다. 우리 시대의 ‘교양’ 수준 을 보여주는 상징적 에피소드다. 잉여로서의 교양을 논하 는 건 잉여가 되어버린 교양, 스스로 잉여적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교양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의미다. 2회에 걸쳐서 교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잉여라는 주체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교양’이라 부르는 것은 영어로 ‘리버럴아트’ (Liberal Arts), 독일어로 ‘빌둥’(Bildung)이다. 정확히 말하면 ‘리버럴 아트’와 ‘빌둥’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 다. 문화권마다 상이한 형태로 교양 교육이 발달해왔기 때문에 영미권의 교양과 프랑스·독일의 교양 개념은 조 금씩 다르다. 하지만 서양 사회의 교양에 본질적인 차이 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빌둥은 개성 있는 인간이 내면 을 갈고 닦아 진정한 자아를 실현한다는 뜻에 가깝다. 19 세기 형성된 독일의 시민계급을 가리키는 말이 교양시민 (Bildungsbürgertum)일 정도로 독일 사회에서 교양과 시 민 교육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편 동양적 교양의 전통도 분명 존재한다. 전통 사회에서 사대부들이 갈고 닦아온 고 전에 대한 지식이나 시(詩)·서(書)·화(畵)의 기예이다. 거 의 1천 년에 걸쳐서 청년들이 고전문학을 바탕으로 시문(詩文)을 작성하는 시험을 치렀다.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관료 가 되어 나라의 행정 업무에 종사했다. 그것이 이른바 ‘출세’ (出世)였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 교양의 일부를 구성하 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 다. 지금 우리가 ‘교양’이라 부르는 개념과 지식 체계는 근대 화 과정을 통해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박권일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을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계간 <자음과 모음R>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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