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7 23:40 수정 : 2012.12.27 23:44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은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부류였다. 뭘 해도 희한하게 ‘튀는’ 사람이었다. 노무현을 혐오한 이들은 대놓고 “품위가 없다”, “천박하다”고 했다. 상고 출신이라는 ‘팩트’를 슬쩍 덧대면서 말이다. 노무현을 사랑한 이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품위가 없는 게 아니라 ‘탈권위’이며, 천박한 게 아니라 소탈한 것”이라고. 어쨌든 양쪽 모두가 동의할 만한 명제는 ‘노무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좀 멍청해 보이기도 한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 중 평범한 이가 있을까? 더구나 노무현처럼 대중에게 열광적 사랑을 받은 정치인은 더욱 드물다. 어떤 면에서든 보통 사람보다 탁월하니 그 위치까지 올라갔을 게다. 그러나 단지 ‘명석하다’, ‘카리스마적이다’ 등의 수사로는 포착해낼 수 없는 ‘무엇’이 그에게 있었다. 노무현은 ‘덕후’였다.

 

이 남자, ‘덕내’ 쩔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덕질 목록
 대통령 노무현의 덕후 기질은 그와 인연이 있는 기자나 측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지했지만,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4년 무렵이었다. 청와대가 ‘발명의 날’을 맞아 “작년(2003년)에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의 감나무에서 감 따는 장치를 발명했다”는 가십을 홈페이지에 소개했다. 많은 이들이 이 뜬금없는 일화에 어리둥절해하거나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청와대 통합업무관리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 프로그램의 특허권자 중 한 명이 노무현 대통령인 게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러곤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통령이 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거야?”

 알고 보니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인 이 남자, 그야말로 ‘덕내가 쩌는’ IT(정보기술) 덕후였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IT 분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해, 나중에는 독학으로 리눅스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미끄러진 노무현은 생애 첫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바로 ‘한라 1.0’이다. 사람 많이 만나야 하는 정치인을 위한 인맥관리 프로그램이었다. 그의 데이터베이스(DB)에 대한 집착은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훗날 ‘참여정부’의 문서기록 정리 작업이 건국 이후 최대 규모가 된 것은 다 노무현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 번의 개선을 거치는데, 일종의 파생상품으로 ‘우리들’이라는 그룹웨어도 있다. ‘우리들’은 “정당, 중소기업에서 인트라넷 환경을 통해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5일)이다. 한라 1.0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는 1998년 ‘노하우 2000’으로 환골탈태한다. 일정관리·연락처·메모·회계·메신저 기능까지 갖춘, 당시 아마추어가 만든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혁신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퇴임 후 만든 정치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도 그가 착안해 시스템 구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청이 전시했던 노무현 독서대. 특허청 제공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쓰는 노무현의 자급자족 정신은 사실 옛날부터 싹수가 보였다. 사법고시생 시절 기존 독서대에 불만을 느껴 개량 독서대를 직접 만들어, 1974년 10월 실용신안과 의장등록까지 마쳤다. 독서대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고시생 신분으로 지인에게 목돈을 빌려 독서대 사업까지 벌였지만 금세 망하고 만다. 이 독서대는 오늘날처럼 책상 위에 올리는 자그마한 게 아니라 좌식생활을 하는 수험생에 맞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책상만 한 크기로 꽤 부담스러운 독서대였다. 아무래도 그는 수완 좋은 사업가는 아닌 듯하다.

 네티즌 사이에 한때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이른바 ‘노무현 밀덕’(밀리터리 덕후) 설도 흥미롭다. 그가 각종 군사장비와 무기에 정통해 역대 대통령 누구도 하지 못한 엄청난 규모로 신무기를 도입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절대 안 판다고 한 최첨단 정찰기 ‘글로벌 호크’ 4기를 도입하기 위한 집요한 시도, 세계 다섯 번째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을 진수하고 또다시 동급 이지스함 3대를 추가 확보하기로 한 결정, K1A1 전차를 191대에서 484대로 증강하기로 한 결정, 차세대 전차 K-2 예산을 2조9천억 원에서 3조4700억 원으로 늘리기로 한 결정, E-737 공중조기경보통제기 도입 추진, 육군 신형공격헬리콥터 KAH 개발추진 등. 한마디로 밀덕들이 환장할 만한 아이템들만 골라 ‘강병정책’을 추진해왔다는 게 노무현 밀덕 설의 요지다.

2004년 이라크에 파병한 자이툰 부대를 전격 방문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향락형 덕후’와 ‘실용형 덕후’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이 즐겨 본다는 풍문이 돌아 화제가 된 ‘미드’(미국 드라마)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 백악관 비서진이라 주장하는 드라마인 <웨스트 윙>이다. (단언하건대 이 드라마의 장르는 판타지다.) 작품 속 미국 대통령 제드 바틀렛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이자 ‘국립공원 덕후’였다. 대체 국립공원이 ‘덕질’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지만, 숫자 몇 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른다. 미국의 국립공원 수는 총 58개다. 각각의 공원에 391개에 달하는 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보행로의 총길이는 2만7350㎞, 도로의 총길이는 1만6천㎞이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스케일이다. 차도 못 들어가는 산골까지 철로가 뻗어 있는 철도왕국 일본에 ‘철덕’(철도 덕후)이 득실거리는 것처럼, 미국에는 국립공원 덕후가 있을 법하지 않은가? 그 많은 국립공원의 이름은 물론이고 세세한 특징까지 바틀렛 대통령은 줄줄 외우고 있다. 그는 이 잡다한 지식을 쉬지 않고 늘어놓아 보좌관들을 괴롭히길 좋아한다. <웨스트 윙> 에피소드 중에는 부수석 보좌관 조시 라이먼이 ‘그날의 희생자’로 당첨돼 대통령의 끝나지 않는 장광설에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장면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덕후라고 다 같은 덕후가 아니다. 노무현과 바틀렛은 다른 유형의 덕후다. 덕후를 분류하는 방법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향락형 덕후’와 ‘실용형 덕후’로 나눠볼 수 있다. <웨스트 윙>의 바틀렛 대통령은 향락형 덕후였다. 국립공원에 관한 세부적 지식을 계속 쌓아나가고 DB화하는 것은 실질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이다. 국립공원에 관한 바틀렛의 지식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의미하며, 바틀렛 자신에게도 그렇다. 국립공원 덕질이 바틀렛에게 주는 것은 지식의 축적 자체가 주는 즐거움뿐이다. 이런 무목적성과 유희성은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순화된 덕후가 아니라 본래적 의미의 덕후, 그러니까 일본의 ‘오타쿠’ 개념과 부합한다. 일본에서 오타쿠라는 말은 ‘사회 부적응자’라는 뜻으로 종종 사용되며, 한국의 덕후라는 말보다 훨씬 더 멸시와 비하의 뉘앙스가 담긴 단어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덕후라는 단어는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개념이다. 덕후라는 단어에는 ‘오타쿠’라는 의미와 ‘전문가’라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으며, 그에 따라 오타쿠보다 더 포괄적 개념으로 변화했다.

 1974년의 개량 독서대부터 2000년대의 ‘이지원’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의 ‘덕질’은 모두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그의 궤적을 훑어가다 보면 또렷한 특징이 드러난다. 그는 특정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학습·업무·일상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데 매혹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노무현은 실용형 덕후였다. 그는 쓸모 있는 것, 도움되는 것에 집착하는 강박적 실용주의자였고, 강렬한 목적 지향성을 지닌 덕질에 임했다. 요컨대 ‘철저히 도구화된 덕질’이다. 어찌 보면 경세가 혹은 계몽가적 기질의 다른 표출 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생활인이 보기에 덕후들은 편집증적이고 폐쇄적인 존재이다. 특히 향락형 덕후는 단순히 기묘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넘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따로 있지 않는 이상) 게토화되거나 심할 경우 범죄시된다. 덕질이 그 자체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유일한 길은 실용형 덕후가 되는 것이다. 노무현이 덕후가 된 것은 특유의 기질과 인정 욕구가 상승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닐까.

박권일 계간 <자음과모음R> 편집위원

관련기사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