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5 23:49 수정 : 2013.03.05 23:50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유사-세계관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재료는 사실들의 파편들과 과대망상적인 상상력이다. 음모론자들은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사실 사이에 숨어 있는 연관성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증거는 어디에나 숨어 있고, 독해법을 안다면 얼마든지 우리 주위에 암약하는 ‘그들’을 찾아낼 수 있다. 애너그램(철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단어로 만드는 것), 숫자, 기호, 패턴, 서브리미널 메시지, 도형…. 지금 이 순간에도 일루미나티(계몽)는 세뇌를 위한 전파를 꾸준히 송신 중이고, 도청과 감시가 우리의 일상을 음침하게 응시한다. 이런 세상에서 한가로이 현실정치 따위나 논하는 것만큼 순진한 것이 또 있으랴. “어이, 거기 당신! 이런 시국에 지금 잠이 옵니까?”

하지만 열정적이고 디테일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들이 난수표나 문자배열이나 숨겨진 도형에서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미국 정부, 다국적기업 등의 음모를 발견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바람에, TV를 켜거나 검색만 해봐도 대문짝만 하게 나오는 사실들에는 정작 취약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어떻게 언론 따위를 믿을 수 있느냐’며 되레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들의 그 지나친 현명함 덕분에, 대화의 한 종류로 분류되는 ‘논쟁’에서는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긴 하지만 말이다.

 

왜 그리 심각해?

결국 음모론자란 현대사회라는 입구도 출구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이들이다. 그러나 이는 음모론자들이 다른 이들보다 좀더 우둔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은 적어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의 지각을 가졌고, 그것을 그냥 덮어두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원인을 찾아 나설 만큼의 용기도 가졌다. 하지만 이들은 놀랄 만큼 고지식한 휴머니즘과 계몽의 신봉자고, 모든 일에는 원인이, 그 원인에는 인간의 (사악한) 의지가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고, 빅브라더는 실수투성이 어린이나 다를 바 없는 멍청한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 그들에게는 이 유명한 한마디가 필요할 것 같다. “Why so serious?(왜 그리 심각해?)”

음모론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신봉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비장한 비밀결사 놀이를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종종 대중적인 세를 얻기도 한다는 점이다. 특히 격변기에, 또는 전쟁이나 재난 같은 것이 닥쳐올 때에 음모론은 힘이 세진다. 기존 질서가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든 일시중지(혹은 붕괴)되고 법과 관습, 일상생활의 기준이 무너져내릴 때 발생하는 거대한 불안은 음모의 가장 좋은 촉매제이자 서식처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음모론들은 어떤 2차적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정한 종류의 고난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특정한 부류의 존재들 탓으로 돌려지면서 발생하는 폭력과 살인, 심지어는 학살이 그것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최태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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