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5 23:47 수정 : 2013.03.05 23:50

21세기 한국 시민사회의 특징적인 변화- 촛불까지 포함해서- 를 추적해나가다 보면, 현상의 배후에 놓인 무언가를 감지하게 된다. 그것은 모종의 가치, 주장, 당위 같은게 아니라 어떤 사고방식 내지 습관 같은 것이다. 이것을 ‘감수성의 다발’이라 부를 수도 있고, ‘망탈리테’(Mentalités·심성)라 부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내용이라기보다 시대를 감각하는 특정한 형식이다. 그 형식이 바로 음모론이다.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광우병 쇠고기 논란, 천안함 사태, 미네르바 사건, 타블로 학력 위조 논란, 18대 대선 개표 조작 논란 등 한국을 뒤흔든 굵직굵직한 이슈마다 음모론은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신드롬이라 할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모으며 출연자들을 일약 스타로 만든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발화 형식 자체가 음모론이었다. 이 ‘음모론의 홍수’는 우연이 아니다.

 

음모론 과잉의 사회적 배경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에 음모론이 창궐한 데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미디어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사적 환경이다. 미디어 환경은 일본의 정보기술(IT) 평론가 우메다 모치오가 말한 ‘총표현사회’(總表現社會)의 도래를 말한다. 우메다는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뉴미디어를 활발하게 활용하는 계층, 기존 ‘엘리트 대 대중’이라는 복층 구조로 파악할 수 없는 중간층, 제3의 집단이 출현했음을 선언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같은 현상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우메다는 특별히 이 계층을 개념화하지 않았지만 그의 총표현사회라는 말을 받아들인다면 이 계층을 ‘표현대중’(表現大衆)이라 명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나는 뉴미디어를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촛불시위를 주도할 정도의 정치성을 띤 수도권 중간계급을 ‘표준시민’이라 개념화한 적이 있다. 표준시민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미디어 활용 능력, 즉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인데, 결국 표준시민은 오늘날 대거 등장한 표현대중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급격히 확대 재생산된 각종 음모론들의 생산주체이자 소비주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음모론의 배경 중 두 번째, 정치사적 환경은 군사독재와 국가적 규모의 정보 통제를 경험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리킨다. 간첩 사건 등을 조작·발표해 선거 결과나 정국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 이른바 ‘북풍공작’이 끈질기게 존재해왔고, 그 시도들이 대개는 그것을 시도한 쪽이 만족할 만한 결과로 귀결되곤 했다. 그중 하나가 1986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벌어진 평화의 댐 사기극이다. 당시 정부 당국은 북한 금강산 댐이 방류할 경우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발표해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88서울올림픽을 망치기 위한 북한의 수공작전”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는 이유로 꼽혔다.

달동네 어린이가 생활비(저금통)를 털어 평화의 댐 모금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뭉클한 미담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훗날 밝혀졌듯 모든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전두환 정권의 집권연장 기도였을 뿐이다. 경험은 편향(Bias)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요인 중 하나다. 오랫동안 반복되고 축적된 국가 권력에 대한 경험적 불신감이 공론장에서 음모론의 확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박권일 계간 <자음과 모음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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