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2:42 수정 : 2013.02.05 02:42

<청담동 앨리스>가 ‘우리 시대의 욕망에 대한 하나의 담론’이라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4회 정도까지는 상당 부분 그렇게 읽을 함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이 드라마는 철저하게 ‘미니시리즈’라고 불리는 장르적 회로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진부했고, 담론이라고 하기엔 너무 낡은 구도가 반복됐다.

미니시리즈라는 장르의 드라마는 대체로 간단하다. 남자 주인공을 ‘키다리 아저씨’로 상정하고 여자 주인공에겐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입힌다. 그러고선 각각의 정도를 상·중·하 혹은 아예 없음으로 구분해 둘을 얽히고 설키게 만든다. 이 둘이 대략 이야기를 만드는 ‘상수’적 요소들이다.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를 많이 넣고 신데렐라 이야기를 조금 넣든가, 아니면 전혀 반대의 조합도 가능하다. 여기에 ‘장소성’ 정도를 변수로 적용하면 한국형 미니시리즈의 장르적 토대 작업은 얼추 완료된다.

<청담동 엘리스>는 딱 그것이다. X축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키다리 아저씨가 존재한다. Y축에는 조금 망설이는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 어느 신데렐라가 있다. 이 둘이 아주 우연히 청담동에서 접촉사고를 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배경이 청담동이니 ‘명품’에 관한 얘기가 필수일 수밖에 없고, 명품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어야 하니 키다리 아저씨의 계급은 실장님으론 부족해 회장님이다. 이때 회장님은 반드시 존재에 대한 회의와 인정 욕구에 가득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모자란 틈으로 태생적으론 그 남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특정한 계기로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되는 가난한 신데렐라가 파고들 여지가 생긴다. 이쯤 되면 모든 조건은 성립되었다.이제부턴 누구나 아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의 반복이다.

오늘날 청담동이 ‘물신의 성’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강남이라는 뭉뚝한 지명조차 이제 너무 넓어, 딱 찍어 청담동이라고 말해야만 느낌이 오는 시대다. 그것이 행정구역상의 구획이건 아니면 경제적 마인드의 고도화 정도에 따른 관계의 차별이건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이미 오래전부터 청담동이 당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하나의 성으로 상상되어왔다는 점이다. <청담동 앨리스>는 철저히 그 지점에서 출발해 끝내 그 자리를 맴돈다. 이건 미니시리즈의 전형적 문법이다. 청담동에 사는 키다리 아저씨와 청담동에서 살고 싶은 신데렐라의 이야기.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잘 알지 못하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 그러다 보니 99%가 알지 못하는 1%의 삶이라고 우기면 되는 손쉬운 판타지. 나나 당신, 아니 우리 모두가 그 성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저 ‘드라마적 판타지’의 어느 찰나에 불과함에도 상관 없는 이야기. 이 모두를 당연시하는 관습 안에서 <청담동 앨리스>의 세계는 구성되고 또 유지된다.샤의 질문에 무조건 이렇게 답해야 한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사랑도 어떤 이에겐 이처럼 ‘갑’질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완 <미디어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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