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4 10:43 수정 : 2013.01.04 10:46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을 정확히 진술하고 있기는 하나, 결이 없고 평평하다. 소우주가 하나씩 소멸하는 비감한 사태와 올림픽 경기를 중계방송하듯 개표 상황을 생중계하는 정치 이벤트가 이렇게 하나의 문맥 위에 놓여도 괜찮은 걸까.

결과에 환호하는 축이야 논외로 하더라도, 정반대 결과를 갈급하던 축은 어떤가. 대선은 양쪽 모두에 ‘전부’ 아니면 ‘전무’를 다투는 일전이었지만,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는 애초 아무 지분도 없는 남의 잔치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결과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그들이다. 이런 역설은 그들이 한 발만 삐끗해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철탑 위의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군소 후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20대 개새끼론’도 고개를 쳐든다. 그러니까 다 합쳐봐야 득표율 0.2%밖에 안 되는 표까지 탈탈 털어 거대 야당 후보에게 헌납했더라면, 젊은이들이 50대만큼만 ‘닥치고’ 투표했더라면 노동자들이 죽을 일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려면 먼저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노동자와 20대의 곤경을 타개할 유효한 장치임을 증명해야 했다. ‘수꼴’(수구꼴통)뿐 아니라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도 자신에게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절반이 넘는 유권자의 선택은 결과로서 엄연하다. 당선인에 대해 외신이 쓴 ‘Strongman’s Daughter’(철권 통치자의 딸)를 일부 언론이 ‘실력자의 딸’이라 의도적으로 오역해 논란이 일었지만, 지금 나는 ‘Strongman’보다는 ‘Daughter’에 의식적으로 눈길을 보낸다. 그는 반대자들은 물론 지지자들에게도 ‘Woman’(주체)이 아니라 ‘Daughter’(소유 대상)였지만, 어쨌든 딸은 생물학적으로 여성 아닌가. 나는 이번 대선에 ‘솥뚜껑의 반란(?)’ 성격이 있었으면 싶다. 어쩌면 2012년은 정치사에서 1987년, 1992년, 2007년보다 더 의미 있는 해로 기록될 것이다. 정신승리법 같은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들>이 ‘낙선’이라는 표현조차 과분해 보이는 두 여성 노동자 후보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다. ‘노동자’와 ‘여성’을 직접 대변할 정치세력의 미래 가능성을 실제적으로 탐문해보기 위해서다. 넘어지고 무너진 바로 그곳에서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낸다면 다시 희망에 베팅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들>은 아직 채 영글지 않은 ‘그것’을 찾아냈다. 그러니, 아직 죽지 마시라. 이것이 <나·들>의 신년사다.


안영춘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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