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1:27 수정 : 2014.07.03 11:27

나는 존엄사를 지지한다. 그리고 존엄사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만큼 나도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다. 제법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논리 뒤로 속내는 따로 있다. 나는 구차한 연명치료를 바라지 않는다. 대체 누구를 위해 그 끔찍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존엄사가 선택권과 관련한 의제라면, 선택항은 ‘사느냐 죽느냐’의 햄릿형이 아니라 ‘누가 계속 아플 건데’ 같은 <1박2일>의 복불복형이어야 한다. 내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가장 이타적이라고 간주되는 부모의 자식 사랑도 자식의 고통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존엄사는 현대의학의 부산물이다. 산물이 아니라 ‘부’산물인 건 현대의학이야말로 죽음에 가장 명백히 개입하기 때문이다. 연명치료는 인위적으로,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인공적으로 죽음을 유예시키는 행위다. 그리고 존엄사는 그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행위다.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의 ‘안락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죽음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다. 중요한 건 연명치료가 삶의 연장이 아닌 죽음의 유예라는 사실이다.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말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구현하는 물리적 사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존엄사가 연명치료와 정반대의 행위라는 건 존엄사 논쟁 프레임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연명치료는 죽음에 가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그 대칭점에 선 존엄사는 삶과 관련된 행위가 아닐까.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려고 안절부절못했던 건 비록 노욕일망정, 죽음을 유예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젊고 건강하게 살려는 의지였다. 존엄사도 마찬가지다. 삶이 끝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어떻게 살 것이냐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사투다. 이보다 더 생을 긍정하는 태도가 달리 있을까 싶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존엄하게 살 권리의 일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삶의 주체성을 갖는 것이다. 내 뜻과 무관하게 죽음이 인공적으로 유예된다면 삶의 마지막 장에서 주체성을 빼앗기고 소외되는 셈이다.

물론 연명치료를 바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가령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쓰러진 재벌 회장의 경우, 경영권에 이해가 걸린 이들과 자신에 대한 온갖 첨단 의료적 조처에 뜻이 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죽음을 유예하면서까지 경영권 승계에 매달린다는 건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도 경영권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을 공산이 크다. 그런 삶을 주체적인 삶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 재벌 기업이 멋대로 주무르면서 법적 책임은 지지 않은 사업장의 하청노동자가 죽었다. 살아서 존엄하지 못했던 노동자는 죽어서도 존엄할 수 없었다. 유언장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주검은 국가 공권력의 손아귀에 놀아났고, 망자의 뜻과 정반대로 ‘처리’됐다. 공권력이 재벌 기업의 한낱 ‘주검 배달부’였을 뿐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노릇이다.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회장님도 소외되고 노동자도 소외됐다. 국가권력의 하부 조직도 소외됐다. 도대체 소외되지 않은 자는 누구이고, 소외를 조장하는 자는 또 누구인가.

우리 삶을 구체적으로 규율하는 힘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미셸 푸코는 전근대 통치술이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라면 근대 통치술의 핵심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라며 이를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생명권력은 범죄자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생명권력이 국민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자살방조죄가 있다. 국가권력은 강기훈씨에게 유서 대필 혐의를 뒤집어씌워 평생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것이 공안통치의 술수였다는 것은 국민이 제 뜻대로 죽지 못하게 하는 힘이 통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방증한다.

생명권력은 “내 뜻대로(너의 뜻과 상관없이) 너희를 살리겠다(죽지 못하게 할 힘이 있다)”고 나직이 속삭인다. 그것을 위해서는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다. 생명권력은 될수록 소프트한 방식을 취한다. 감시·통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다. 원형감옥에서 간수는 모든 죄수들을 한눈에 일별하며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를 보지 못한다. 설령 감시와 통제가 보이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된다. 학교는 공부도 시켜주지만 노동에 필요한 인내심을 어려서부터 주입한다. 때려도 안 아프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속으로 골병든다. 삶의 주체성도 그렇게 상실된다.

병원이 생명권력의 핵심적인 통치기관이라는 건 존엄사와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병원 권력은 살리는 힘이기도 하지만 죽지 못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 두 얼굴은 근대,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명권력 내부(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역학 및 공모와 이에 따른 차이를 잘 보여준다. 무상의료에 가까운 국가일수록 존엄사 인정에 적극적인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의료 시장화 정도가 심한 국가일수록 그 반대다. 무상의료는 살리는 쪽에, 시장화는 죽지 못하게 하는 쪽에 가깝다. 딱 죽지 못할 만큼만 아파야 시장이 쑥쑥 성장한다.

세월호 참사는 어느 쪽일까. 사건의 크기만큼이나 큰 질문이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질문을 끝내 내려놓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희생자들은 왜 존엄하게 죽을 권리마저 박탈당했을까도 그중 하나다. 박근혜 정부가 참사의 진상 규명을 얼버무리면서 속전속결로 의료 민영화를 밀어붙이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것은 시장의 가치로 환산된다. 그 극한의 가치가 신자유주의다. 죽지 않을 만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를 지배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하지만 세계 금융위기로 심각한 모순과 한계를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는 이 체제가 현재 죽음의 임계점 언저리에서 연명치료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인지도 모른다.

세월호와 함께 언론도 침몰했다고 한다. 이 말 또한 내겐 단순한 수사로 들리지 않는다. 언론의 침몰은 오래전부터 예비돼왔고, 구조나 체제의 문제와 깊이 닿아 있다고 본다. 근대 언론은 기본적으로 상업주의 언론이다. 옐로저널리즘이라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기업이고, 시장을 상대로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권력의 제4부로서 나라를 살리고 국민을 살리겠다고 자임한다. 생명권력의 통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언론의 위기도 심각해지고, 그들의 보도는 단말마를 닮아가지 않을까.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문학은 어원으로도 실제로도 픽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읽고 쓰는’ 모든 실천이 문학이었고, 가장 강력한 혁명의 도구였다. 루터의 종교혁명은 읽고 쓰기의 혁명이었다. 문학이 픽션의 범주에 갇힌 것은 근대 이후다. 이때부터 논픽션은 저널리즘으로 딴살림을 차렸다. 언론은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인 셈이다. 근대 생명권력을 상징하는 병원 권력이 인간의 고통을 ‘요구’하듯, 언론도 시스템이 궤멸하지 않을 만큼의 참극을 요구한다. 체제의 위기 때문에 그 요구가 통제 불가능할 만큼 내부 압박을 키우면서 이번 사달이 난 것은 아닐까. ‘기레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

세월호 참사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언론의 위기를 사건으로 드러냈다. 언론은 경영 위기뿐 아니라 신뢰 위기까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나·들>은 그 위기의 원인 가운데 각별히 언론의 지독한 ‘사건 편집증’에 주목했다. 사건이 중심에 오면 사람은 삶의 주체로 재현되지 못하고 소외된다. 사건에 빠진 언론이 사람을 보는 방식은 가해자와 피해자, 나쁜 놈과 좋은 놈의 이분법밖에 없다. <나·들>은 사건의 자리에 사람을 복원시키겠다는 뜻을 품고 2012년 11월에 창간했다. 사람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삶의 주체로 재현하고자 했다. 사건화되지 못한 사람들의 존엄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것은 순리였다.

어느덧 스물한 번째 <나·들>을 내게 되었다. 그리고 더는 낼 수 없게 되었다. 이번호 맨 마지막 글인 이 글을 쓰면서도 난 자신에게 묻고 있다. 이 새벽, 마지막 글을 쓰기 위해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느냐고.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나·들>을 만들어왔느냐고. 앞으로도 치열하게 지난 2년의 기억을 되살리며 저널리즘의 가치와 미래 전망을 물을 것이냐고. 그래서 이 마지막 호가 존엄사가 될 수 있게 하겠느냐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패배했을까요? 진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 니체 자신이 말한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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