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31 15:08 수정 : 2014.05.02 15:01

사자성어는 좀 다른 이유에서 특별하다. 여기서 ‘좀 다르다’의 용례는 형용하기 쉽지 않은데, 빗대자면 21세기 서울 강남에 출현한 구한말 명동 댄디보이쯤 될까. 정치인의 네 글자 신년 휘호에서는 고리타분함이 느껴지지만,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촌철살인에 또 이만한 게 없을 성싶다. 시대착오와 첨단성, 한정된 글자 수와 다의적 함의, 정언(定言)과 가정(假定), 엄격함과 신랄함, 사유와 처세술…. 그저 넓고 다양한 게 아니다. ‘정숙한 요부’라는 성 착취적 판타지보다 성립하기 어려운 이율배반적 조건이 이 단출한 형식 안에 줄줄이사탕처럼 도열한다.

요즘 인문학 현상은 사자성어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강단 인문학이 인기 없는 정치인의 신년 휘호처럼 여겨진 지 오랜데, 학교 담장 밖 인문학은 각계의 수많은 이들에게 지적 영감, 힐링, 스펙이라는 3단 콤보 미션 임파서블을 제공하며 번창해왔다. 이런 현상을 보면 사자성어야말로 가장 인문학적 형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히려 이건 인문학이지만 저건 인문학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도 썩 인문학다운 태도는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는 어떤 인문학이 더 인문학다운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학의 가치는 답보다는 질문에 있을 것이다.

<나·들>도 낯선 질문을 던져보았다. 강단 인문학과 강단 밖 인문학이라는 이분법, 그리고 그 이분법에 터를 둔 흥망론은 옳은가. 쉽게 눈에 띄는 것만을 믿는 것도 인문학다운 태도는 아니다. 인문학 현상조차 인문학의 사유 대상이다. 꽃 소식이 먼저 당도한 전남대를 찾은 이유다. 고사 직전이라고 알려진 강단에서 인문학은 파릇파릇 잘 자라고 있었다. 인문학 이분법과 흥망론은 인문학이 경계해야 하는 또 하나의 물신이었다. 강단 인문학이 강단 밖으로 문을 활짝 열면 강단 인문학도, 강단 밖 인문학도 존재이유가 입증된다는 걸 확인했다.

취재 과정에서 뜻밖의 사건과 조우하기도 했다. 전남대 철학과 구성원 한 사람이 불미스러운 일을 벌여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다. 하늘을 원망하고 싶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도 떠올랐다. 하지만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돌아가자 다시 앞이 보였다. 인문학은 답의 완성이 아니라 끝없는 탐문 과정일 것이다. 그러고 나니 ‘호사다마’도 인문학의 사유 대상으로 들어왔다. 인문학은 단독자의 학문에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학문이며 사회를 지향하는 학문이다. 인문학 안팎에 아무 일도 없다면 더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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