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4:54 수정 : 2013.01.04 16:14

이케아 설립자 잉바르 캄프라드가 스웨덴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사람들은 흔히 이케아를 ‘민주적인 기업’이라고 부르지만, 이케아 가구업체가 다수의 소비자를 위한 제품을 제공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문구는 이 기업에 서열이 존재하지 않거나 부하직원이 상사와 친구처럼 지내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케아는 지배자의 권력이 자식에게 계승되는 왕국에 가깝다. 이케아의 경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늙은 왕이 세 사람의 후계자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아(IKEA)의 I와 K는 창업자 이름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에서 따온 것이다. E는 그가 자란 스웨덴 스몰란드의 숲 속 마을 엘름타리드(Elmtaryd), A는 고향 이웃 마을 아군나리드(Agunnaryd)를 뜻한다. 이 이름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창업자의 개인적 면이 이렇게 오랫동안 강하게 기업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잉바르는 자신의 분야에서 가히 스티브 잡스라고 불릴 만하다.

 이케아의 수장으로서 17개 회사를 창업한 잉바르는 86살이다. 지난해 부인이 숨졌고, 자신도 심장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스웨덴 신문 <엑스프레센>은 네덜란드에 위치한 이케아 모기업 잉카홀딩의 감사위원장 괴란 그로스코프의 말을 인용해 잉바르 캄프라드가 곧 물러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케아의 대변인은 이 보도를 부인하고 잉바르가 잉카홀딩의 고문으로 직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과연 권력이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잉바르와 세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던 것일까? 만일 잉바르 캄프라드가 더 이상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 기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

 

83살이지만 영향력 여전히 강해

 캄프라드 가문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페어 히긴스는 이 모든 것이 오해라고 했다. 서로 상관없는 세 가지 일이 섞여 과장됐다고 한다. 첫째로 캄프라드의 세 아들은 이케아 사보 <리드미>(Readme)를 통해 회사에서 자신들이 맡을 역할에 대해 정확히 밝혔다. 동시에 이케아는 새로운 최고경영자(CEO)에 페터 아그네팔을 내정하고 2013년 9월부터 기업 경영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감사위원장인 그로스코프는 기자에게 잉바르 자신이 종종 하던 말, “나이가 들었으니 슬슬 일을 줄여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었을 뿐이었는데 이것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잉바르 캄프라드가 완전히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잉바르는 잉카홀딩의 고문직 외에 이케아 왕국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가 기업에서 물러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라고 히긴스는 말했다.

 잉바르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과 힘을 가능한 한 많은 이케아 지점을 점검하는 데 쓰고 싶어 한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이런 그가 최근 예외적으로 스위스 경제지 <빌란츠>와 인터뷰를 했다. “나는 사실 예전보다 일을 적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살아온 86년간의 경험은 아직 쓸모가 있지요.”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듯 잉바르 캄프라드는 이케아에서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항상 낮춰 이야기한다. 사실 잉바르가 이케아를 손아귀에 꽉 쥐고 있는 것은 회사 안에서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잉바르가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는 중요합니다.”

 <이케아에 관한 진실>이란 책을 쓴 요한 스테네보는 “잉바르가 말한 것을 잘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 이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테네보는 1990년대 잉바르의 비서였고, 당시 이케아 CEO는 안데르스 달빅이었다. 2009년까지 안데르스 달빅은 이케아에서 잘나가는 사람이었으나 잉바르의 큰아들 페터와 사이가 나빠져 회사를 떠났다.

 스테네보는 잉바르 캄프라드가 어떻게 이케아를 지배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직원들을 대하는 방식에 등급이 있다. “그가 당신을 껴안는다면 당신은 꽤 일을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껴안고 볼에 가벼운 키스까지 한다면 그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증거지요. 하지만 다음번에 키스를 받지 못한다면 당신은 ‘왜지?’라고 궁금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잉바르는 정확히 그 이유를 알고 있지요.”

 가구 분야에서 쌓은 경험과 세밀한 부분까지 꿰뚫는 지식 덕분에 잉바르는 현재까지 이 분야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가 러시아에서 벤 소나무를 폴란드에서 가구로 만들면 스웨덴에서 얼마에 팔릴지를 계산하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잉바르 캄프라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케아의 소유주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전설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케아에 미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의 권력은 룩셈부르크에 있는 인터이케아시스템이라는 지주회사의 이사진 가운데 한 명이면서, 같은 이름의 네덜란드 유한책임회사를 ‘지배’하는 데서 나온다. 인터이케아는 이케아라는 브랜드와 비즈니스 콘셉트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터이케아는 가구를 팔지 않는다. 가구 파는 일은 판매 허가(라이선스)를 받은 다른 기업이 한다. 40개국에 338개 점포를 운영하는 회사로부터 인터이케아는 매출액의 3%를 챙긴다. 이것은 특이한 형태의 프랜차이즈이다. 판매 허가를 내주는 이 룩셈부르크의 회사가 누구의 소유인지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2011년 초 스웨덴 TV 기자들은 ‘세금천국’ 리히텐슈타인의 재단인 인터로고재단이 인터이케아의 소유주임을 밝혀냈다.

일 잘하는 직원만 껴안고 뽀뽀

 이런 관계망들이 오랫동안 감춰져왔다는 사실은 캄프라드와 경영진의 세금 회피 의혹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리히텐슈타인을 선택했다는 점도 의혹을 부추겼다. 캄프라드는 <빌란츠>와의 인터뷰에서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장소가 “좋지 않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밝혔다. 이를 비밀로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내 생애에 저지른 수많은 어리석은 일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즐긴다. 잉바르는 여러 해에 걸쳐 자기 변명을 예술적 형태로 승화시켰다. 지난 몇십 년간 자신의 약점(알코올의존증, 외국어를 못하는 점, 난독증 등)을 자랑하듯 대놓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인색함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기업의 지향점에 적합한 덕목으로 포장했다. 그는 자신을 싼 가격의 물건을 사러 다니는 사람, 가장 저렴한 가격을 찾아내는 전문가로 형상화했다. 가격과 관련되지 않은 디자인 분야는 직원에게 맡겼다.

 그의 약점과 기벽은 이케아를 친근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고국 스웨덴에서는 젊은 시절 스웨덴 극우파에 가입한 것 때문에 그를 좋게 보지만은 않는다. 잉바르의 할머니는 수데텐란트(20세기 초반 독일 민족이 많이 거주하던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지역. 체코인과의 갈등으로 이곳 독일인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히틀러가 이 지역을 독일에 합병시켰다) 출신이고, 아버지는 독일 작센주에서 태어났다. 잉바르는 노르디시 유겐트(스웨덴의 나치 그룹) 회원이었고, 그 뒤 우파 지도자 페르 양달의 신스웨덴운동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는 이케아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그것은 내가 후회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기를 쓴 베르틸 토레쿨과 함께 이 일에 대해 밝혔다. 하지만 그는 나치 정당 중 하나인 스웨덴사회주의모임의 회원이었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몇 년 뒤 스웨덴 여기자가 발견한 한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 문서는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스웨덴의 보안경찰이 그에 대해서 작성한 것이다. 그는 당시 17살에 불과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쿤겐스 쿠르바에 인접한 이케아 매장. 위키미디어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정당 활동

 잉바르 캄프라드는 1970년대에 고향을 떠나 덴마크로 갔고, 나중에는 스위스로 이주했다. 이는 스웨덴 세금법과 외환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재단에 관한 비밀이 밝혀진 뒤, 그는 2011년 다음과 같은 해명을 내놓았다. “이케아를 은행과 주식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시에 세금 면에서 효율적인 구조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케아처럼 전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기업에는 세금을 이중으로 매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케아 지점이 있는 곳에서 한 번 그리고 스웨덴에서 한 번, 이중으로 세금이 부과될 수 있으니 말이다.

 잉바르는 자신이 이케아를 더 이상 관리할 수 없을 때에도 이케아가 이전처럼 잘 돌아가도록 해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국외에 두고 이를 쪼개 2개 재단에 넘겼다. 이 일을 진행시킴으로써 그는 소유권을 포기하고 오직 ‘약간의 영향력’만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한번 자신을 낮춰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가족들과 함께 일한다. 잉바르 캄프라드와 막내아들 마티아스는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인터로고재단의 고문으로 함께 일한다. 재단의 고문은 여러 명이고, 이들 모두 캄프라드 가족은 아니지만, 어쨌든 캄프라드 가문의 최고 어른인 잉바르의 지시에 따라 운영된다. 재단의 규칙에는 고문 한 명이 그만두면 잉바르가 그 후임을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잉바르가 숨지고 나면 그의 아들들은 권력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고문들은 그만둘 때 스스로 후임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누구 한 명에게 거대한 권력이 가는 것을 막도록 만들어졌다.

 가구 파는 지점과 스웨덴 알름훌트에 있는 본부로 이루어진 이케아그룹 또한 1982년부터 한 재단 소유다. 스티흐팅잉카재단이라고 불리며, 네덜란드에 있다. 네덜란드의 재단 운영 관련 법규는 다른 나라에 비해 관대하다. 누가 차후에 이 재단을 관리할 것인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현재 재단을 운영하는 사람은 잉바르 캄프라드 자신이다. 둘째 아들 요나스가 그를 돕고 있으며 스웨덴인 3명이 고문으로 있다.

 그룹 이사진도 이와 비슷한 구성이다. 독일 출신의 인사 관리자인 페트라 헤세가 있는데, 그녀는 예외에 속한다. 경제위기에도 매출을 그대로 지켜낸 CEO 미카엘 올슨은 현재 스웨덴 출신인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있다.

 이케아 스웨덴 담당 경영자였던 41살의 페터 아그네팔이 곧 그룹 경영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신호탄이다. 이로써 잉바르의 세 아들 중 누구도 그룹 전체의 경영을 넘겨받지 않는 것이 확실해졌다. 세 아들은 아버지가 이루어낸 왕국의 각각 다른 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큰아들은 아버지 꼭 닮은 ‘붕어빵 구두쇠’ 

 1964년생인 페터 캄프라드는 가문이 소유한 또 다른 복합 기업 이카노의 회장이다. 룩셈부르크에 있는 이카노 지주회사는 은행, 보험사, 부동산 개발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캄프라드 가문은 이카노를 통해서도 이케아 점포를 운영한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타이의 이케아 점포는 이카노 자회사 중 하나가 운영한다.

 페터 캄프라드는 작은 일에 집착하며 화를 잘 낸다는 평을 듣는다. 아버지처럼 어떤 낭비도 참지 못하는 극단적 구두쇠이기도 하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했고, 덴마크 여성과 결혼해 아이들과 함께 브뤼셀에서 산다.

 1966년생으로 디자인을 전공한 둘째 아들 요나스 캄프라드는 이란 여인과 결혼해 런던에서 산다. 그는 가구 부문 경영자로 일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캄프라드 가문은 2009년 그를 이케아 체인에서 내쫓았다. 현재 요나스는 이케아 모기업인 잉카홀딩의 이사로 일하며 제품 제작과 개발에 신경 쓰고 있다. 최근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좋아하는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했다. 1951년 모델인 의자를 새롭게 제품 목록에 올려놓은 것이다.

 막내아들 마티아스는 1969년에 태어났다. 판매 허가를 내주고 이득을 챙기는 룩셈부르크의 지주회사를 관리하는 그는, 이케아 덴마크의 사장직을 지냈고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사보 <리드미>에서 그는 2세대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주된 임무는 이케아의 콘셉트와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 각 부문에 최상의 경영진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가족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가구제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케아의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 사업은 번창하고 있다. 2011년 이 기업은 252억 유로(약 35조2800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30억 유로(약 4조2천억 원)의 이익을 냈다. 올해 매출과 이익은 내년 1월에 발표될 예정이다. 올해 매출은 7% 정도 증가한 것으로 전망된다. 이케아는 2020년까지 수익을 2배로 올리고, 점포 수를 500개까지 늘리는 목표를 세웠다.

 이케아는 지속 가능성 전략도 내놓았다. 이 전략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에너지 절약 제품, 환경을 고려한 목재와 수자원 활용에 관한 것이다. 이케아는 120개 점포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했고, 6개국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했다.

끊임없는 조세 회피 비판

 ‘선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잘 가꾸어온 이케아에도 약점은 있다. 세금 납부에 인색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거대한 기업이 세금을 얼마나 조금 내는지 놀랄 수밖에 없다. 2011년 이 기업은 전세계적으로 7억8100만 유로(약 1조934억 원)를 세금으로 냈다. 수익의 21%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에 비해 유통기업인 메트로는 2011년 수익의 50%를 세금으로 냈고, 더글라스는 37%를 냈다.

 이케아 독일은 이보다 더 적은 세금을 낸다. 독일에서 이케아는 순수 판매 회사로서, 비교적 쉽게 계열사에 높은 비용을 부과할 수 있다. 결국 신고되는 이익이 줄어들어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이다. 헤센주 발라우에 있는 이케아 독일본부는 독일에서 세금을 얼마나 내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잉바르는 번 돈을 모으고 지키는 일을 매우 중요시하는 기업가다. 상속인들조차 이케아에서 돈을 빼갈 수 없다. 그가 항상 말하듯이 이케아는 “성곽처럼 지어졌다.”

 하지만 이케아는 지나치게 견고한 성곽이 되고 말았다. 2006년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이케아 기업 구조를 보도하면서 이케아와 관련된 2개 재단 중 네덜란드에 있는 스티흐팅잉카재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재단은 360억 달러로 추정되는 자산이 있는데, 이는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의 재단보다 더 큰 규모다.

 빌 게이츠나 멜린다 게이츠와 달리 잉바르는 오랫동안 회사 돈을 자선 목적으로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꼭 필요한 데가 아닌 곳에 돈 쓰는 것을 병적으로 혐오했다. 잉바르의 전직 비서였던 스테네보는 “내가 그와 일했을 때 그는 자선 관련 일이라면 분노와 혐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성향은 바뀌었다. 일찍이 잉바르가 아들들에게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자선재단은 최근 점점 더 많은 기부를 하고 있다. 지난해 이케아재단은 제3세계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6500만 유로를 내놓았다. 이케아재단은 스티흐팅잉카재단이 새로 만든 자선재단이다.

 “올해는 9천만 유로에 이르는 돈을 기부할 것”이라고 페어 히긴스가 전했다. 그는 한때 아우그스부르그에서 공부했고 런던에 있는 버슨마스텔러 홍보회사에서 일하기도 한 노르웨이인으로, 현재 이케아재단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 자선재단은 이케아가 주관하는 여러 자선행사를 조직하는 일을 한다.

 

늘그막에 자선활동에 거금 쾌척

 이케아재단의 돈은 주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이나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쓰이는데, 이는 이케아가 겪은 일과 관련 있다. 과거 이케아는 파키스탄 어린이들이 짠 양탄자를 팔았다. 이 사실이 TV를 통해 밝혀지면서 기업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고, 그제서야 양탄자 공급자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케아는 어린이들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캄프라드가 운영하는 자선재단은 주로 경험이 많은 자선단체들과 손잡고 일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나 유니세프 등이 대표적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직접 난민 구호소를 운영한다. 히긴스에 따르면 2015년까지 1억 명의 어린이들이 이케아가 후원하는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을 것이다.

 잉바르 캄프라드의 주도하에 이케아는 가장 큰 자선단체 중 하나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것이 그가 노년에 남긴 업적일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잉바르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히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잉바르가 말했지요. 이케아가 충분히 단단해졌으므로 이제 과거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 Die Zeit

뤼디거 융블루스 <차이트> 기자

번역 이상익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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