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4:52 수정 : 2012.12.28 04:52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겨레 자료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주자였던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그레텔과 평생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31살 연하의 여성 아를레테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숨지기 전까지 연인으로 지냈다. 그의 가정생활과 사랑은 자신의 ‘부정적 변증법’ 이론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걸까.

● 등장인물

테오도어 W. 아도르노(1903~69) 독일 철학자·사회학자

아를레테 피일만(1937~78) 연극배우. 아도르노의 정부(情婦)

그레텔 아도르노(1902~93) 화학자. 아도르노의 부인

로테 토비쉬 (1926~ ) 오스트리아 연극배우. 아도르노의 여자 친구

클라우디아 피일만(1959~ ) 아를레테의 딸

니콜라스 루만(1927~98) 독일 사회학자

알렉산더 클루게(1932~ ) 작가·영화제작자

니콜라스 루만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서 테오도어 W. 아도르노 교수의 강의를 한 학기 동안 대신 맡게 됐다. 독일의 조용한 지방 도시 뤼네부르크 태생인 루만과 대도시 프랑크푸르트 출신 아도르노. 루만은 뤼네부르크 맥주 양조업자의 아들인 반면, 아도르노는 프랑크푸르트 포도주 대도매상의 아들이다. 1968~69년 겨울학기. 강의 의무가 없는 이 학기에 아도르노는 저서 <미학 이론>을 집필하는 데 전념할 생각이다. ‘행정’에 관한 논문으로 명성을 얻은 루만이 독일 사회학 분야에서 비판이론의 대표자로 손꼽히는 아도르노 교수 대신 강의하게 된 것이다. 루만의 강의 주제는 ‘열정으로서의 사랑’이었다. 이 강의록은 한참 뒤인 1982년 책으로 출간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강의록에는 ‘은밀함의 암호화’라는 부제가 달렸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글 치고는 부자연스러울 만치 무미건조한 이 논문이 사실은 1967년 가열찬 학생 혁명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것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당시 아도르노의 지인이며 작가 겸 영화제작자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다섯번 째 책: 새로운 이력서들>(2012)에는,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루만의 프랑크푸르트대학 강의 활동에 관해 쓰여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강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참석자 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충격의 ‘젖가슴 사건’

 오호, 여학생들! 격동의 시기에 아도르노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아도르노의 여성 편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66년 4월 22일 독일 사회주의학생연맹(SDS) 주도로 벌어진 이른바 ‘젖가슴 사건’은, 그의 이런 성향에 대한 공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날 강의에 들어온 여학생들 중 3명이 갑자기 강단으로 올라가 아도르노에게 꽃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학생들은 입고 있던 외투를 열어젖히고 젖가슴을 내놓은 채 교수에게 키스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이에 아도르노는 도망치듯 서둘러 대학을 빠져나갔고, 그의 ‘변증법적 사고 개론’ 강의는 중도 종강됐다.

 그런데 아도르노의 마음에 근심을 드리운 여성은 정작 학생이 아니었다. 아도르노보다 30살 아래인 그의 생애 마지막 정부(情婦)는, 뮌헨 출신의 연극배우이자 화가, 사진모델, 보헤미안(집시)이며 뮤즈였다. 뮌헨 호엔촐레른 광장의 그녀 집에는 배우 한나 쉬굴라, 영화감독 에드가르 라이츠, 알렉산더 클루게 등 예술계 인사들이 끊이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녀의 딸은 “우리 집은 늘 손님으로 바글거렸어요”라며 당시 활발했던 집안 분위기를 회상한다. 아도르노 또한 손님으로 정부를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아를레테 피일만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부인 그레텔 아도르노. 한겨레 자료
아를레테 피일만에 대해서는 클루게가 여러 해 전에 밝힌 적이 있다. 2003년 출간된 클루게의 책 <악마의 함정>에는 그녀가 매주 토요일 아도르노를 만나기 위해 뮌헨에서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그의 집까지 여행했다든가, 아를레테가 아도르노의 아내인 그레텔의 침대를 사용하고, 그레텔은 자리를 피했다든가 하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정부를 향한 아도르노의 ‘열정적 사랑’을 화학박사인 그의 아내는 알면서도 감수했을 거라는 게 클루게의 추측이다. 그레텔의 이성적 합리주의와 현실감에 바탕한 판단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2012년 현재 시점에서 그레텔에게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해서 남편 아도르노와 정부 사이를 ‘허락’한 건 아니었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아를레테에게도 이런 식의 만남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아를레테의 딸은 어머니가 눈물을 자주 흘렸다고 회상한다. 아도르노와 아를레테가 다툰 적이 많고, 그럴 때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을 다치곤 했다. 결국 아를레테는 아도르노와 헤어져 영화제작자인 발터 크니터와 결혼하지만, 얼마 뒤 다시 아도르노 곁으로 돌아오고, 그러다 다시 그를 떠난다. 클루게의 책에는 아를레테와의 사랑이 어려움에 처하자 아도르노가 루만에게 조언을 부탁했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학자이자 시스템 이론을 주창해, 장차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의 대척자로 부상할 바로 그 사람에게 말이다!

 두 사람이 만날 장소로 아도르노가 선택한 곳은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건너편 ‘라인강의 황금’이라는 포도주 주점이었다. 아도르노는 맛있는 음식을 보면 앞뒤 안 가리고 포식하는 편이었다. 그런 아도르노가 토질이 척박한 뤼네부르크 벌판 출신인 동료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인생을 향유하는 분위기인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미식가 품새로 환대해준 것이다. 루만은 당시 팔츠산 포도주를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클루게의 책에는 쓰여 있다. 아도르노는 볼테르식 쇠고기 스테이크를, 루만은 자우어 브라텐(쇠고기를 시큼한 소스에 오래 절여두었다가 굽는 요리)을 주문했다. 식사하는 동안 아도르노는 평소 누구에게나 그랬듯 아를레테 없이 살 수 없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얼마 전 ‘음악을 만드는 돈 많은 녀석’(클루게의 표현이다)에게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돈 많은 녀석’은 바흐 연주자인 카를 리히터로, 역시 기혼자인 그를 아도르노는 굉장히 시기했다고 책에 쓰여 있다. “바흐는 좋아하지만 바흐를 연주하는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도르노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노학자와 31살 젊은 연극배우

연구실의 아도르노. 한겨레 자료

 “아도르노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 사람과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게 습관이 된 루만에게는 마치 예고 없이 피부 접촉을 한 것 같았다”고 클루게는 쓰고 있다. 루만은 개신교 신자인데다 평소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는 편이었음에도, 내적인 문제를 그토록 숨김없이 털어놓는 동료의 처지를 잘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젊은 동료는 아도르노에게 일종의 ‘귀족 세비(歲費)’를 제공해보라는 조언을 한다. 클루게는 이것을 ‘여자 친구에게 풍족하게 살 만큼 재정적 도움을 주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루만은 또 이렇게 조언했다. “그러다보면 한동안 우정 관계가 지속되고, 언젠가는 예전의 친밀함을 되찾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비는 절대 무슨 대가성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 이쪽의 신의의 표현, 즉 저쪽에서 모욕을 받았으나 이쪽은 너그러움으로 대응한다는 표시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이에 어울리는 저쪽의 신의 있는 행동도 동시에 요구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클루게의 책에 있는 이 구절을 읽고 분을 터뜨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를레테의 딸이다. 자기 어머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창녀가 아니다”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딸 클라우디아 피일만 역시 연극배우로 현재 뮌헨에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아도르노의 정부였을 때는 어린아이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아도르노가 진지한 연인 사이였다는 걸 자신 있게 증언한다. 아도르노를 ‘테디(테오도어의 애칭) 아저씨’라고 불렀고 장난감 하마 세트가 있던 아저씨의 프랑크푸르트 집, 아저씨가 ‘나비야 나비야’와 ‘오리들이 모두 다’란 노래를 연주해주던 그랜드 피아노, 아저씨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장난하고 놀았던 즐거움 같은 것을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뿐인가. 당뇨병 환자인 테디 아저씨가 외식할 때면 레스토랑에서 언제 당뇨가 있었느냐는 듯 요리를 먹어대는 ‘죄’를 지었던 것까지 뚜렷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두 사람에겐 자기가 최상의 알리바이였을 거라고 클라우디아는 확신한다. “어머니는아도르노를 그의 집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호텔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창녀가 아니다” 

 딸의 목적은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악한 정부, 천한 여자, 요부였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죽게 되었다고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바로잡겠다는 의도다. 그것이 그녀가 <차이트>에 연락한 이유였다. 두세 번 이메일을 교환한 끝에 직접 만나는 대신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2시간 남짓 진행된 통화 내내 클라우디아는 속내를 털어내고 또 털어냈다. 활발하고 조금은 펑크 스타일로 말하는 그녀는 집시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였죠”라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인 16살에 파리로 가서 모델 일을 하며 “목돈을 만들었다”고 했다. 아주 어릴 적에는 키임제 호수 근처의 유아원에서 살았고, 그 뒤에는 어느 나이 지긋한 부인의 손에서 컸다는데, 어머니를 원망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녀는 ‘어머니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딸’ 같았다.

 어머니가 ‘가해자의 딸’(나치 전범의 자손)이란 점을, 그래서 파시즘이라면 철저히 반대한다는 점을 클라우디아는 특히 강조했다. 아를레테의 결혼 전 성은 티게스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클라우디아를 임신했고, 아버지는 그런 딸을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켰다. 아버지는 부퍼탈 출신의 성격이 차가운 자산가였다. 나사 공장을 경영했는데, 러시아에서 온 강제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다뤘다. 나치를 신봉하는 이른바 ‘남성주의’ 인간이었던 아버지를 아를레테는 몹시 증오했다. 클라우디아는 “그래서 어머니에겐 ‘아버지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아도르노처럼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에게 보호받기 바란 건 바로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거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어머니를 전혀 보호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시대 넘나든 아를레테, 그렇지 못한 아도르노

 클루게에게 전화를 걸어 용건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도 안면이 있을 클라우디아만이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기억되기 원해서 편집국을 찾아왔다고. 아를레테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클루게는 그녀가 얼마나 탁월한 인물이었는지 열광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림처럼 아름답고 다방면에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명석하게 사고하는 능력이 출중했으며, 보통의 ‘남편-아내’ 틀에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했다. 아를레테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며, 아도르노가 그녀를 실망시킨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클라우디아 말이 전적으로 옳으며, “아를레테라는 보석을 도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가 불쑥 “통화하면서 아를레테가 그린 그림을 쳐다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를레테는 클루게보다 5살 아래였다. 두 사람은 같은 세대에 속하고, 이른바 ‘오버하우젠 장전’을 선포함으로써 신독일영화회사를 궤도에 올려놓은 영화 모임의 회원이었다. 클루게는 “아를레테는 18세기 궁정에도 잘 어울릴 사람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몇 세기를 자유롭게 넘나들 만한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아도르노는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철저히 그저 ‘시민’으로 머물러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아도르노에게 아를레테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클루게 같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에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를레테는 그러지 않아도 전국 방방곡곡을 내 집처럼 누비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클라우디아는 수많은 사진을 포함해 어마어마한 문서를 보유하고 있다.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어머니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증거 한 가지가 빠진 것이 문제였다. 아도르노가 아를레테에게 쓴 편지들을 클라우디아가 다 태워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 편지는 읽는 법이 아니다”라는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에 따라 한 일이다. 물론 그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그런 처지에 있다면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거다”라고 말했다. 그 편지들을 읽고 싶어질 게 뻔하니까. 다만 이 ‘증거 부재’가 자신의 입지를 좁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두 사람의 관계가 담고 있는 복합성을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편지만큼 좋은 자료가 어디 또 있겠는가.

 그 편지는 이제 다시 찾아볼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많은 단서를 제공해줄 자료가 그래도 한 가지 남아 있기는 하다. 아도르노와 로테 토비쉬 사이에 오간 편지이다. 로테 토비쉬는 아를레테와의 사랑과 관계되는 한 아도르노의 공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사적인 서신 왕래>테오도어 W. 아도르노와 로테 토비쉬 공저, 드로쉴 출판사, 2003). 이 편지에서 아도르노는 자기의 ‘팔려간 신부’(아를레테를 지칭)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야기를 듣는 “귀여운 로테”는 “저 팔려간 신부도 아도르노를 다정하게 대해야 할 텐데, 그래서 아도르노가 고민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라며 걱정을 한다. 로테 토비쉬 폰 리보틴 남작 부인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으로 아를레테 못지않은 미인이고, 아를레테처럼 아도르노보다 수십 살 어리며, 역시 연극배우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도르노의 정부로서는 물망에 오르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동지애 같은 우정이 싹틀 수 있었다. 그 바탕 위에서 탄생한 아도르노와 로테의 편지들은 우아함과 동시에 빈 특유의 비밀스러움을 담고 있다.

모두 불 살라진 연애편지

 토비쉬는 아도르노의 내면에서 치솟는 자긍심에 찬 분노를 잘 진정시켜줬다. 동시에 아를레테와의 관계에서 아도르노가 설계한 자화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아도르노의 모든 행동과 감정(그는 로테에게 이런 것들을 스스럼 없이 전부 털어놓았다)을 100% 받아들이고 아무 비판 없이 인정했다. 심지어 아도르노는 1968년 5월 20일 아를레테와 함께 아를레테의 할머니 집을 방문하러 간 키일에서조차 로테에게 그림엽서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한번은 ‘팔려간 신부’가 돌아왔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편지를 쓴 적도 있다. 그를 떠난 아를레테가 온갖 잡음을 일으키며 다시 그에게 돌아왔는데,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면서.

 아도르노와 아내 그레텔, 그리고 정부 아를레테 사이의 삼각관계는 1960년대에는 결코 당연한 일이 못 됐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로테 토비쉬는 있을 수 있는 일처럼 그 관계를 심상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도르노가 아를레테를 대하는 ‘순진함’의 기저에는, 그의 ‘현실 거부’가 자리잡고 있다고 클루게는 보고 있다. 그래서 그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숨기거나 계산하지 않은 채 어린아이처럼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가 토비쉬에게 보낸 편지들은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도르노는 매우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수)와 이모 덕분이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그가 자라던 프랑크푸르트와, 가족이 초여름 휴가를 즐기곤 하던 아모르바흐에서 외아들인 아도르노를 감싸안고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당시의 아도로노는 신동 ‘테디’로 그려보아야 한다. 아도르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곱게 자란 이 소년이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이탈리아 성인 아도르노를 물려받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면 유대인 아버지의 성인 비젠그룬트는 단지 약자 ‘W’로만 성과 이름 사이에 남았다.

부족함 없이 자란 신동 외아들

1964년 막스 호르크하이머(왼쪽)와 함께 있는 아도르노(오른쪽). 뒤편 오른쪽에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는 사람이 위르겐 하버마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1969년 4월 22일, 아를레테가 최종적으로 떠났을 때의 심정을 아도르노는 “내 삶 자체가 종말을 맞은 것 같다”고 쓰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그가 한 말은 사실상 옳았다. 그로부터 4주일 뒤 스위스 산중에서 아도르노는 심장마비에 걸려 입원했기 때문이다. “테디가 임종을 맞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 놀라서 혼이 다 빠져버렸어요. 부랴부랴 질스마리아(아도르노가 입원해 있던 스위스 휴양지)로 달려갔지요”라고 클라우디아는 회상한다. 그런데 그레텔 아도르노와 그레텔의 언니가 아도르노를 “마치 지옥 문지기 같은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아를레테는 문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테디를 무척 사랑했어요. 하지만 그레텔이 있는 한 아도르노와의 관계에서 전혀 기회가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지요.” 아도르노는 극구 부정하려 했지만 아내와 정부 사이에 분명히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 모드 공장 소유주의 딸인데다, 한쪽은 유대인의 딸이고 다른 한쪽은 나치 전범의 딸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았을까.

 아도르노가 아내에게 얼마나 무리한 기대를 했는지 짐작케 해주는 기록이 있다. <꿈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후인 2005년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발간한 아도르노의 수기 모음이다. 아도르노는 꿈에서 깨면 즉석에서 그 내용을 기록했다. 휘갈겨 쓴 그 텍스트를 나중에 정서하는 것은 아내 그레텔의 몫이었다. 1967년 12월 17일의 기록을 보면, 희한한 남편의 이 꿈을 그레텔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꿈에서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우아한 정부가 있었다. A를 생각나게 하고 사회의 어떤 유명한 여성을 닮은 이 정부가 자랑스럽다. 그런데 그녀가 나한테 성기 세척기를 반드시 장만하라고 했다. 나는 매일 목욕하기 때문에 몸이 언제나 깨끗하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그 기계를 써야만 그 부위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 세척기 회사의 판매원으로 고용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잠에서 깨어 한참을 웃었다.”

 “A와 함께 동반 자살 계획을 의논하고 있었다”는 1969년 4월 12일 꿈은 전혀 웃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목숨을 끊으려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대단히 이성적이라고 알려진 자연과학자 그레텔이 남편 사망 1년 뒤 자살을 기도한 것이다. 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로 인해 그레텔은 1993년 임종할 때까지 다른 사람의 간호에 의존해야 했다.

아도르노가 꿈꾼 삶의 구조는 실현 가능할까

 아를레테는 아도르노가 숨진 지 9년이 지난 1978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함부르크에서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녀의 차는 울름의 고속도로 진입로 지점에서 차선을 이탈해 전복됐다. 아를레터는 하얀 벤츠의 운전석에 앉은 자세 그대로 사망했다. 그녀는 41살로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아 규칙적으로 일을 했고, 독자적인 수입도 확보해가고 있었다. 업무상 여행도 많이 했다. 상품 생산 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다니는 것이었으니 아도르노의 꿈이 예지력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꿈에 나온 그 세척기를 파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를레테가 독일 전역의 병원에 소개하고 다니던 상품이 다름아닌 심장병 환자들에게 이식하는 심장박동 조정기였다는 사실 역시 아이러니였다.

 아를레테의 처지는 세상의 모든 정부들이 지고 있는 운명, 즉 정식 결혼이나 명성의 주변 인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서 늘 제외되는 운명의 일부다. 일종의 희생당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당한 희생일 수도 있고, 뒤에 오는 세상이 그녀를 희생시킨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도르노가 아를레테에게 재정적 도움을 거부한 건 사실이다. 그녀가 얼마나 형편이 어려운지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레텔 또한 아를레테의 생활비를 보조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아도르노는 1969년 8월 6일 사망했다. 클루게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사인을 아를레테에게 당한 실연의 충격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감상적인 해석이다. 그녀가 아도르노를 떠난 시점이나 여대생들의 ‘젖가슴 사건’의 시점이 그의 사망일과 놀랍도록 인접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당뇨병 환자임에도 섭생에 주의하지 않은 그의 평소 식습관이라든지, 비만한 몸집이면서도 3천m나 되는 고지로 무모하게 산행한 것만으로 사망 원인이 되고도 남는다는 게 의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아를레테에 관한 최초의 상세한 보고서로는 하인리히 아돌프가 <아도르노의 초상>(주어캄프 출판사·2007)에 기고한 글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아를레테의 사진이 한 장 실려 있다. 챙이 넓은 모자 밑에 보이는 짧은 머리, 검은색 윤곽이 뚜렷한 타원형의 눈, 곧은 콧날, 전체적으로 세련된 도시풍의 외양이 전형적인 1960년대 스타일이다. 이 책에는 아를레테가 아도르노를 베를린 힐튼호텔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가 쓰여 있다. 그녀는 아도르노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얼마 전에 읽었던 참이라 첫눈에 아도르노에게 “아도르노 씨 맞지요?”라고 즉흥적으로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 순간 저명한 사회학 교수 아도르노의 마음에 번개처럼 박힌 그 무엇이 정열적인 사랑의 시발점이 된 것이리라. 한편 아도르노와 그레텔의 부부관계는 이 리비도의 폭풍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온전히 보전되었다. 아를레테가 아도르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어디까지나 아도르노의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기껏해야 아도르노의 결혼생활 외곽 자리만 허락됐다.

시민사회에서의 결혼, 풀기 힘든 딜레마


 아도르노의 공범인 로테 토비쉬는 그레텔과 아도르노 사이의 일을 “샴 쌍둥이의 관계”라는 말로 감싸려들었다. 두 사람이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은 두 사람이 저지른 공공연한 속임수를 우리 시야에서 가려버린다. 니콜라스 루만은 이 딜레마를 자신의 강의록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좀더 분명하게 통찰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시민사회에서 결혼이란 제도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딜레마다. 사랑이라는 지극히 내면적인 감정을 경제라는 교환관계의 지붕 아래 가둬놓고 결합을 축하하다니 어디 될 말인가. 그런 조건 아래에선 사랑의 대상인 정부가 마침내 더 이상 놀라움도 분노도 야기할 수 없는 존재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결혼생활이 시스템 이론적으로 분석된 셈이다.

 클루게는 정부의 생활비를 대라는 루만의 제안을 아를레테를 향한 루만의 호감의 표현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루만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도르노가 처한 객관적 상황일 뿐이지 않았을까. 사랑보다는 쾌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던 17~18세기 유럽 궁정의 정부 전통으로 소급해가면서까지 ‘귀족 세비’라는 기묘한 제안을 했을 때, 그는 바로 아도르노의 태도를 예리하게 부각시키면서 논평했던 것은 아닐까. 호사하는 귀족층이나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이 전통이 유효적절한 장치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학생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일반 시민과 착실하게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교수들에게는 전혀 걸맞지 않은 시스템이었을 것이다.

 루만은 아도르노가 원했던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다. 당시 사회학계의 거목으로 존경받던 아도르노를 강단에서 모욕한 ‘젖가슴 사건’이라는 우상 파괴 행위 또한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인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몸만 자란 아이이기도 했던 아도르노에게 꽃을 뿌린 여대생들이 속옷을 입지 않은 젖가슴 위에 가죽재킷을 걸쳤던 것 역시 그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 Die Zeit

이나 하르트비히 Ina Hartwig 문학박사

번역 장현숙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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