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1:30 수정 : 2014.03.02 14:21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이태 전 큰딸이 대학수능시험을 치른 날 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감독 임순례·2001)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함께 보았다. 그녀가 성인의 문턱에 들어설 때를 생각해 오래전 점찍어둔 영화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그 영화를 탁월한 성장영화로 보았다.

<빌리 엘리어트>에서처럼, 성장영화라면 으레 어린 주인공이 시련 앞에 한때 방황하지만 꿋꿋이 극복하고 성인이 되어 마침내 꿈을 실현하는 플롯을 좇는다. 하지만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꿈으로서의 물성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꿈의 리얼리즘이란 그 꿈이 실현되지 않는 영원한 유예에 있는지도 모른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에 빠진 고등학생은 꿈의 나날을 살고, 훗날 오부리(유흥주점 즉석 반주)를 하다 취객에게 모멸을 당하는 성인은 현실의 나날을 산다. 주인공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엔딩에서 마침내 ‘몽환’적인 연주를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생으로 꿈과 현실, 소년(녀)과 성인의 뫼비우스적인 관계를 이토록 쓸쓸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달리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거실 불을 켜자 큰딸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그렇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달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씨가 작고했다는 부음 기사가 났다. 기사가 크고 요란할수록 애도의 진정성에 의심이 갔다. 나는 평소 이미테이션 가수들을 볼 때도 자주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떠올렸다. 이참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검색해봤다. 화면을 따라 내려가다 특별출연 명단까지 보게 된 순간 미간이 좁아졌다. ‘너훈아’는 ‘이엉자’ 바로 위에 있었다.

어느 장면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기억 없음이 곧 이미테이션 가수의 근원적 쓸쓸함과 닿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기억의 해상도가 낮은 그 닮은꼴의 존재들에게도 한때 꿈이 있었을 것이다. 현실은 그 꿈과 무관하지 않을 테지만, 꿈의 실현은커녕 배신일 수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번에 만나보고 알았다. 그들 또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였다.

진짜냐 가짜냐는 사실 성립할 수 없는 구분이다. 예술은 모방(미메시스·Mimesis)이니까. 그 구분 너머에서 모든 쓸쓸한 존재들은 어딘가 닮은꼴이다. 여성 로커의 삶을 우뚝하게 살아가는 서문탁의 격정적인 몸짓도, 살아 있으면 올해 쉰이 되는 김광석의 하회탈 같은 웃음도 쓸쓸해서 닮았다. 그들의 쓸쓸함은 실현되지 않은 소년(녀)의 꿈이 현실로 타전하는 선율은 아닐까.

그런데 이번호 <나·들>에는 가수가 몇 명이나 등장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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