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4:14 수정 : 2014.02.04 10:46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절묘해야 타이밍이다. 조금만 늦거나 일러도 안 된다. 하지만 감각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늦는 게 타이밍이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건 시점이 절묘하지만, 울고 싶은 마음은 눈앞에 별이 번쩍이기 직전까지 성마르고 애달프다. 타이밍은 물리적으로는 중립적이되 심리적으로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번호 ‘나들의 초상’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를 다뤘다. 이미 다른 기획을 해서 한창 취재 중이었는데, 주말 집에서 뒹구는 사이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12월의 절반을 넘어선 일요일 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마음 한구석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다음날 오전 기자들을 불러모아 곧장 기획회의에 들어갔다. 새해 인사말을 연상시키는 절묘한 신년호 주제이지만 마감이 걱정됐다.

처음엔 이 낯선 현상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열풍’이라고 했는데, 취재를 하면 할수록 ‘안녕들 하십니까’는 반드시 지금 여기 도래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연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빈틈없는 서사적 맥락을 거느린 채, 우리가 그만큼 불안과 고통에 애간장을 태웠음을 새삼 환기시키며, 전례 없는 형식과 양태로, 그것도 가장 절묘한 타이밍에 ‘안녕들 하십니까’는 찾아왔다. 그래서 사건이다.

이번 사건의 출발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0년 동안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사회운동적 현상들은 대부분 조직에 의해 지도되거나 기획되지 않고, 개인적 주체들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것도 따르르한 명사가 아니라,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라고 비하되던 이름 없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거듭되는 우연은 더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밝히는 건 언론에도 중요한 과제일 터이다.

조직에 진입하려야 진입할 수 없는 배제된 세대의 급진화는 필연적이다. 중심·조직·지도가 없다는 것은 취약성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기민함과 유연함, 증식성이라는 강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강점은 계급을 분할하고 파편화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지배체제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주체들이 바로 ‘나들’ 아닐까. 다음 사건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얼굴로 도래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차! 지금 새해 인사를 못하면 내년 이맘때에나 할 수 있겠다. 타이밍은 절묘하면서도 조급해야 한다. 원고지 남은 몇 칸에 쓴다. “새해에는 어떻게든 안녕들 하십시오.”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