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8:21 수정 : 2014.01.07 10:38

자기가 본 것만을 믿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고 만다. “속지 않는 자가 속는다”(les non-dupes errent)는 라캉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역설이다. 자신이 상징적 허구에 던져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눈만을 믿는 사람들은 가장 잘 속는 사람들이다. 오직 자신의 눈만을 믿는 냉소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상징적 허구의 실효성, 즉 이 허구가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슬라보이 지제크, <하우 투 리드 라캉>, 55쪽

인류가 상상한 디스토피아의 형식은 크게 두 개로 구분된다. ‘갈등 없는 사회’와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사회’. 갈등 없는 사회는 올더스 헉슬리가 오래전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것처럼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모두가 안온하며 모두가 만족스러운 사회는 무한대의 마약이 제공되는 아편굴과 다름없다. 갈등 없는 사회는 요컨대 동질성과 동어반복의 지옥이다.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사회’ 역시 유구한 전통을 가진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바벨탑 설화다. 같은 언어를 쓰던 인간들이 신에게 도전한 벌로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를 갖게 되었다는 이 서사는 이질성과 타자화(他者化)의 지옥을 가리킨다.

두 개의 디스토피아, ‘갈등 없는 사회’와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사회’는 접점 없는 상극으로 보이지만 실은 어떤 지옥이 지닌 양면성이다. 그 지옥의 이름은 적대(Antagonism)의 지옥, 적과 아군만 존재하는 세계다. 여기서 적은 소통 불가능한, 절멸시켜야 할 타자고 아군은 내부에 어떤 이견도 존재해선 안 되는 동일자다. 그래서 적대가 넘쳐나는 사회에서는 타자에 대한 배척이 심하면서도 동시에 순혈주의와 동일화 압력도 강하다. 연대·상호부조의 수준은 낮은 반면 정실주의·가족주의·연고주의의 수위는 매우 높다.

많은 관찰자들이 성실하게 보고한 것처럼, 오늘의 세계는 적대의 지옥이다. 만연한 탈정치의 분위기에서 근본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이 전례 없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세계에서는 사소한 갈등이 극단적 적대로 쉽게 전이된다. 한국 사회의 경우 특유의 역동성까지 더해져서 그야말로 악머구리 끓는 적대의 포화 상황에 놓여 있다. ‘동지냐 적이냐’ 혹은 ‘우리냐 남이냐’의 이분법이 모든 다른 목소리, 그리고 작은 목소리에 재갈을 물린다. 시대정신은 이렇게 요약된다. “닥치고, 넌 누구 편인데?”

소셜 맥거핀?

적대 없는 사회는 불가능하다. 적대는 늘 복수로, 즉 ‘적대들’이란 형태로 상존한다. 문제는 적대 자체가 아니라 ‘과잉 적대’(Excessive Antagonisms)와 ‘사이비 적대’(Pseudo Antagonisms)다. 뒤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과잉 적대는 과대평가된 적대들, 한마디로 ‘뻥튀기’된 적대들이다. 사이비 적대는 조작된 적대, 만들어진 적대다. 두 유형의 적대들이 양산되면서 적대의 과잉 내지 사회 갈등의 포화 상태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 중대한 사회적 적대가 은폐 또는 왜곡되거나 과소평가된다. 이러다보니 실제 적과 동지가 나뉘는 계급적 문제에서 모호하거나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기술적·공학적 이슈에서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식의 전도가 일상화됐다.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왜곡하는 적대들의 범람은 역설적이게도 ‘갈등을 통한 사회 통합’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한다. 적대와 위기를 끝없이 발명해냄으로써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런 적대들을 이제부터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이라 부르기로 하자. 잘 알려졌다시피 ‘맥거핀’이란 말은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 중 하나로 다음의 일화를 통해 설명된다.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로 가는 열차를 탔다. 한 사람이 선반에서 짐을 발견한다.

“저게 뭡니까?”

“아, 그거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죠?”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사는 사자를 잡기 위한 도구죠.”

“스코틀랜드 고지대엔 사자가 없는데요?”

“그래요? 그렇다면 맥거핀은 아무것도 아니군요.”

맥거핀은 영화의 줄거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관객의 눈을 잡아끌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극중 인물들은 모르지만 관객은 알고 있는, 탁자 밑의 시한폭탄 같은 것들이다. 이 폭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계속 카메라에 잡히고 째깍째깍 타이머가 돌아간다. 저 폭탄이 언제 터질까, 관객은 마른 침을 삼키며 지켜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관객만 ‘낚는’ 것, 그것이 바로 맥거핀의 기능이다.

소셜 맥거핀은 영화 속 맥거핀과 다르다. 이 폭탄은 실제 폭발하기도 한다. 적대가 과대평가됐든 사이비이든 간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순간부터 그 사안은 수많은 사회적 실천을 동반하는 ‘실체’가 된다. 소셜 맥거핀을 분석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함정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에 지나치게 얽매일 경우 소셜 맥거핀의 분석은 거짓말의 폭로 또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수사관의 작업과 다를 바 없어진다. 물론 그런 작업도 의미 있겠지만 이 글의 목적과는 거리가 있다. 소셜 맥거핀이 전제하는 대중은 권력자의 여론 조작에 일방적으로 속아 넘어가는 순박한 군중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소셜 맥거핀의 희생자라기보다 공모자다. 자신의 눈만을 믿는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아진 시대, 집단지성과 소셜미디어 시대의 대중은 ‘팩트’를 따져가며 기성 매체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서슴없이 드러낸다.

소셜 맥거핀은 오직 자신의 눈만 믿는 냉소주의자들, ‘팩트주의자들’이 어느 때보다 많아졌기에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컨대 ‘전라도 혐오’에 대해 사람들은 실제 전라도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실제 전라도 사람은 그렇다고 갑론을박하면서 전라도 혐오라는 증상은 점점 더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적대가 되어간다. 이데올로기 현상에 대응하는 팩트주의에 대해 지제크는 이렇게 정리한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유대인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적인 관념은 유대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슬라보이 지제크,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94쪽)

‘혼을 실은 구라’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이 본격화하던 무렵인 1965년, 사람들이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차지철이 느닷없이 베트남 파병 반대에 나선 것이다. 국회에 상정된 증파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공화당 국회의원이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이 어떤 인물인가. 박정희 측근 중의 측근이 아닌가. 실상은 허탈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측근인 차지철에게 파병 반대 ‘쇼’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파병 반대 여론이 비등하다는 핑계로 미국으로부터 좀더 많은 걸 얻어내려는 ‘꼼수’였다. 이런 식으로 없는 내부 갈등을 있는 것처럼 연출하는 것은 박정희의 특기였는데, 1963년 3월 이른바 ‘군 일부 쿠데타 음모 사건’이 그 시초였다. 박정희가 민간인 정치 해금을 추진하려 하자 군 일부가 반발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것은 박정희가 이른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명분 쌓기 용도였다. 박정희가 실제 살해될 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에 비견되는 소셜 맥거핀이 노무현 정부 시기에 있었다. 역시 파병 건이었다. 이라크 파병 정국 당시 국회의원 유시민의 행보는 차지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떤 때는 대통령의 대미 협상 부담을 덜기 위해 국민이 파병에 반대해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네오콘의 보복’ 운운하며 파병에 찬성한다. 유시민이 생산한 소셜 맥거핀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대 여론의 국면에 따라 이라크 파병 반대와 찬성을 지속적으로 오락가락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의 생명과 김선일씨의 죽음을 놓고 반전평화 세력이 그은 전선을 집요하게 교란시켰다.

또 하나의 사례로, 황우석 사태 때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 홍혜걸의 ‘국론 통일’ 주장이 있다.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지난해 기자는 영국 학술잡지 <네이처>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보다 난자의 출처가 궁금했던 것이다. 겉으론 생명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남들에게 열매를 빼앗길 수 없다.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 이를테면 ‘선진국이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질투해서 황우석 흠집내기에 나선다’는 논리였다. 홍혜걸은 황우석을 둘러싼 한국과 선진국 사이의 가짜 적대를 설정해 사람들의 민족주의와 경쟁심을 자극했고 실제로 이 칼럼은 큰 반향을 불러왔다. 민족주의 서사를 이용한 전형적인 소셜 맥거핀이다.

소셜 맥거핀은 많은 경우 국익이나 공익, 혹은 정의를 빙자해 출현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셜 맥거핀이 숭고한 내적 동기에서 탄생한다. 있지도 않은 내부 갈등을 조작하는 짓을 밥 먹듯 했던 박정희조차, 그런 거짓말을 한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의 진심일 것이다. 아마 유시민 역시 이른바 ‘국익’을 위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소셜 맥거핀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혼을 실은 구라’다. ‘진정성’ 같은 심정윤리를 통해 사회문제를 판단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야말로, 소셜 맥거핀이 자라날 최적의 환경이다.

권력 비판과 대중 비판

소셜 맥거핀은 좌파들이 오래전부터 애용해오던 ‘지배 이데올로기’ 개념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줄 수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란 한마디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공교육 등의 메커니즘을 통해 재생산되고 강화된다. 확실히 지배 이데올로기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헤게모니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분석하는 데 강력하고 유용한 틀이긴 하지만, 실재와 가상의 이분법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너무 정태적이어서 인터넷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21세기의 역동적인 대중 현상의 동학에 대해 구체적이고 적실한 설명을 제공해주기 어렵다. 게다가 잘못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를 지배 이데올로기의 작동 과정으로 환원해버리는,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비판이 되어버릴 수 있다. 예컨대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 직원의 전라도 혐오 댓글 같은 명백한 사이비 적대들은 권력의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만들어낸 소셜 맥거핀이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던 이데올로기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국가정보원 사건은 이미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언제, 어디서 환기되는지에 따라 얼마나 파괴적인 효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셜 맥거핀은 개념상 사회적 적대들 간의 투쟁을 전제하므로 주체의 담론적 개입과 실천이 핵심적 관건이 된다. ‘대중이 소셜 맥거핀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모자’라는 말은 대중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대항 이데올로기 역시 대중의 개입과 실천에 의해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오늘날 이데올로기 비판은 대중을 희생자로 스테레오타입화하는 형태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권력 비판과 대중 비판은 완전히 별개일 수 없다. 개인은 권력이 아니지만 대중은 권력이기 때문이다. 대중 비판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대중에 대한 계몽과 훈계가 아니라 내면화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벗겨내는 성찰적 과정이어야 한다. 앞으로 동시대의 다양한 소셜 맥거핀을 살펴볼 것이다. 이 작업의 일차적 목표는 과잉 적대들과 사이비 적대들 속에 숨은 이해관계를 폭로하고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소셜 맥거핀들의 홍수 속에 은폐된 적대를 발굴하고 그 적대들에 대중이자 주체로서 개입하는 것이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