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1 13:35 수정 : 2013.09.02 13:43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내 안에서도 가끔 ‘일베’가 보여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를 만난 곳은 한 진보 시민단체에서 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후 마련한 뒤풀이 자리였다. 더 놀라운 건 그 자리에 동석한 다른 대학생들도 얼추 맞장구를 쳤다는 사실이다. 일베를 ‘불가촉’ 집단으로 여겨오던 터라, 순간 위생학적 경계심을 품었다. 일베는 진보 성향 젊은이들에게까지 무차별로 전염되는가.

그날 이후, 일베 취재에 들어갔다. 게시판에 올라 있는 글에는 될수록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동안 언론은 그 글들을 다분히 축자(逐字)해 오프라인의 인격으로 재구성 하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자칫 상상의 인격을 실재하는 존재로 일반화할 우려 가 있는 것이다. 물음의 구조도 그에 연동해 바꿨다. ‘일베는 누구인가’에서 ‘누가 일베인가’로. 현실 속의 사람을 찾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첫 번째 실패는 일베 게시물 가운데 하드코어를 생산하는 인물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들은 실재할 것이다. 다만 다수는 아닐 것이다. 직접 만나본 일베 회원들도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고, 극히 소수일 거라고 추론했다. 두 번째 실패는 ‘일베’와 ‘비일베’의 뚜렷한 경계를 찾지 못한 것이다. 회원에 가입하면 일베고 이른바 ‘눈팅’만 하면 비일베라는 형식 논리는 공허하 다. 만나본 이들에게서는 오히려 상식, 정상성의 단서가 도드라졌다.

평범한 개인이 체제의 광기에 집단적으로 복무하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20세기 독일 나치 체제에서 봤다. 일베는 나치의 징후일까. 아직은 판단을 유보하는 게 좋을 성싶다. 일베 안에서의 행위는 ‘투사’라기보다는 그저 ‘배설’에 가깝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 이다. 만에 하나의 확률이더라도, 집단 광기를 허투루 경계할 순 없다. 그러나 경계 대상이 일베인지 아닌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자, 이 문제의 핵심이기까지 하다.

일베 회원의 평범함이 일러주는 사실은,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양태의 주체가 그들이 아 니라는 것이다. 주체는 하드코어 생산자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물음의 구조를 바 꿔보자. ‘나치는 누구인가’에서 ‘누가 나치인가’로. 힘의 논리와 민족의 논리를 혼합해 ‘역사 진 보’라는 관념을 주조해낸 이들이 바로 나치의 주역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힘과 집단의 논 리를 중시한 건 보수인가, 진보인가. 다시 만난 그 대학생이 말했다.

“전 아무래도 보수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그는 오히려 진보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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