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1:51 수정 : 2012.12.28 01:51

강단 인문학이 고사 직전에 몰린 반면 강단 밖에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도구적 이성이 대학을 장악하는 사이 대학 밖에서는 도구적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넘쳐나면서 벌어지는 삼투압 현상이다. 공간 이동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의 이슈가 인문학적 담론 안으로 불려 들어오고, 시정의 말과 학문의 말은 한 문장 안에서 이물스럽지 않게 뒤섞인다. 이런 흐름과 현상은 인문학이 저널리즘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또한, 저널리즘도 인문학의 인력에 이끌린다. 자발적인 착취가 미덕이 된 ‘피로사회’에서 힐링이니 명상이니 하는 것들은 대증요법일 뿐이다. ‘나들’은 어떤 인식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나·들>이 인문학에게 길을 묻는다.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편이다. 동물의 외양이 강렬한 시각적 쾌락을 주는데다, 습성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뭔가 배우는 게 있기 때문이다. 점도다리가 팔랑팔랑 헤엄치는 모습이 내게는 꽃보다 열 배 아름답다. 장어가 필리핀 근처 심해에서 태어나 아시아 각지의 해안으로 수만 리를 헤엄쳐 가는 모습도 만리장성보다 더 감동적이다. 작은 체구와 단순성, 절실함, 거기서 비롯되는 지독한 창의성. 횟집에서 한 접시의 단백질로 환원되는 이 작은 생명체에 그런 서사가 있다는 사실의 각성은 감동과 지적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강한 호기심을 느낀 동물 중에는 사마귀, 거미, 연가시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시각적 쾌락을 줄 만큼 아름다운 동물이 아니다. 당장 징그럽고, 공상과학(SF) 영화에서처럼 크기가 갑자기 커진다면 끔찍할 존재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내 주목을 끈 것은 특이한 생존 방식 때문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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