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뱀의 정치’를 떨쳐내는 ‘나들’ [2012.12 제1호]
‘나들’로 모인 윤리·정치적 주체는 어떤 인간인가. 윤리와 정치가 분열된 사회, 스타일이 현실을 대체한 성과사회에서 그들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강단 인문학이 고사 직전에 몰린 반면 강단 밖에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도구적 이성이 대학을 장악하는 사이 대학 밖에서는 도구적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넘쳐나면서 벌어지는 삼투압 현상이다. 공간 이동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의 이슈가 인문학적 담론 안으로 불려 들어오고, 시정의 말과 학문의 말은 한 문장 안에서 이물스럽지 않게 뒤섞인다. 이런 흐름과 현상은 인문학이 저널리즘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또한, 저널리즘도 인문학의 인력에 이끌린다. 자발적인 착취가 미덕이 된 ‘피로사회’에서 힐링이니 명상이니 하는 것들은 대증요법일 뿐이다. ‘나들’은 어떤 인식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나·들>이 인문학에게 길을 묻는다.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편이다. 동물의 외양이 강렬한 시각적 쾌락을 주는데다, 습성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뭔가 배우는 게 있기 때문이다. 점도다리가 팔랑팔랑 헤엄치는 모습이 내게는 꽃보다 열 배 아름답다. 장어가 필리핀 근처 심해에서 태어나 아시아 각지의 해안으로 수만 리를 헤엄쳐 가는 모습도 만리장성보다 더 감동적이다. 작은 체구와 단순성, 절실함, 거기서 비롯되는 지독한 창의성. 횟집에서 한 접시의 단백질로 환원되는 이 작은 생명체에 그런 서사가 있다는 사실의 각성은 감동과 지적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강한 호기심을 느낀 동물 중에는 사마귀, 거미, 연가시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시각적 쾌락을 줄 만큼 아름다운 동물이 아니다. 당장 징그럽고, 공상과학(SF) 영화에서처럼 크기가 갑자기 커진다면 끔찍할 존재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내 주목을 끈 것은 특이한 생존 방식 때문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