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6 10:37 수정 : 2013.08.07 12:06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내가 남자인데다 (아마) 앞으로도 내내 이성애자일 거라는 사실에 나는 종종 원죄 의식을 느낀다. 원죄 의식은 존재론 과 인식론의 교차점 위에 위치할 것이다. 존재 자체가 곧 죄 인 게 원죄이고, 그걸 인식하는 게 원죄 의식 아니겠는가. 내 가 설령 성 인지성에 날개 한 쌍 달더라도 생이 다할 때까지 생물학적·젠더적 남성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터이다. 나는 이미 ‘속해 있다’. 이것 은 내 사유와 행동의 전제이자, 성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임옥희 지음)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의 미덕은 수도 없 지만, 유독 한 대목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성애를 레즈비언 간의 성애 가운데서도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보고, ‘실제 그런 성애를 바라는 페미 니스트들이 적지 않았다’는 회고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저자는 그런 경향 성을 다층적이고도 정교하게 분석·비판했다. 이야기에 당혹했고, 또 해석에 안도했다.

내 성 정체성을 거듭 환기하면서 말하자면, 성애가 정치적 실천 대상이고, 이에 따라 성 정체성도 선택 가능하다는 태도는 내 감각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다. 성애에서 낭만성을 분 리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럴 수 있다 한들 나도 정치적으로 각성하면 게이가 될 수 있 는 걸까. 나는 성애가 오로지 본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적 구성력 이 미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만 환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예가 극단적이고 예외적일지 몰라도,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얼핏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런 태도에 대해 나는 오히려 퇴행의 혐의를 둔다. 성 정체성을 의지로 선택할 수 있 다는 생각은 성 소수자를 타락, 의지박약, 구제 대상으로 치부하는 보수 종교계의 선동과 너 무 상동적이지 않은가. 나는 여성학이 모든 도그마를 회의하는 데서 기원한다고 알고 있다. 위의 책을 통해 이 학문 내부에 다양하고 복잡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좋았다.

얼마 전 우연찮게 남의 편지를 보았다. 지난 6월호 ‘나들의 초상’에 나온 집결지 출신 여 성 사라(가명)에게 익명의 주부가 보낸 것이다. 이 여성은 존재를 삭제당한 사라가 자아를 찾 아가는 이야기에 깊이 공명해 힘껏 용기를 주고 싶어 했다. 그가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존재 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은 정치적 기획에 선행하고 돌봄은 우주를 돌고 돈다는 사 실은 내게 명백하다. 그 기사가 성매매 문제를 개인화했다는 비판을 접한 뒤라, 나는 인식의 변증법을 경험하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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