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6 11:13 수정 : 2013.06.12 10:48

안영춘 편집장
어려서 사내아이들은 종종 투명인간 되기를 꿈꾼다. 불주사를 맞으려고 줄을 설 때면 당장 해리포터에 빙의해 투명 망토를 두르고 싶어 한다. 물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보다 훨씬 자주 상상하는 상황과 장면이 있다는 건 여성들도 대번 짐작할 줄로 안다.

그러나 좋아하거나 되고 싶은 슈퍼히어로를 꼽으라면 투명인간은 대기 번호표도 받지 못한다. 투명인간은 힘이 세지도 않고, 걸핏하면 냄새 맡고 쫓아오는 개를 피해 전봇대를 기어올라 도망쳐야 하는 신세다. 심지어 영화 <할로우맨> 주인공은 찌질한 스토커에 성추행범이다. 하지만 이 영화야말로 투명인간에 관한 모든 남성의 판타지를 가장 진솔하게 드러낸 게 아닐까. 투명인간은 지구를 구하기는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다. 회피와 모면, 훔쳐보기용으로만 특화된 캐릭터라니, 투명인간은 마땅히 콤플렉스와 리비도 덩어리여야 한다.

투명인간은, 판타지에서 현실의 은유로 이동하면 더욱 남루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없는 사람 취급 당하면 마음만 아픈 게 아니다. 투명인간 약물을 주사하고 난 직후의 격한 신체 반응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할 수도 있다. 임상적 증언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회피, 모면, 훔쳐보기는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현실에서는 거꾸로 비가시화, 외면, 배제의 대상으로 선택당한다. 그나마 추방은 면하지만 더 큰 고통이 따를 수 있다. “죽이지 않을 거면 상처 주지 마라.”(영화 <스파이더맨3>)

투명인간은 사회적 소수자와도 등치되지 않는다. 소수자는 존재가 인지되었기에 호명될 수 있다. 그러나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으니 애초 인지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야 그렇지만,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삭제된 존재라는 걸 새삼 일깨우는 역설이다. 왕년에 영업왕이었다가 지금은 투명인간이 된 <직장의 신>(KBS2)의 고정도 과장이 적확한 사례다. 아니면 삭제되었던 존재가 사후에 인지되기도 한다. 뒤늦게 알려진 배우 이지아의 20대 때가 그렇다. 어느 경우든 모든 투명인간은 후천적이며, 타자의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수자’라는 호명은 이미 인권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투명인간’이라는 호명은 현상 유지적이다. 소수자는 그 자체로 복수형이며, 어렵더라도 연대를 도모할 동류의 대상이 전제된다. 그러나 투명인간은 산산이 깨진 유리 조각과 같다. 이번호에서 투명인간이라는 존재들을 탐문하며, 이 표현은 삭제된 존재를 복원하기 위한 각별한 목적으로 제한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 관음이 아니라 가시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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