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7 20:01 수정 : 2012.12.27 20:02

<나·들> 창간호
<나·들>은 제호가 곧 ‘표적 수용자’(타깃 오디언스)다. 그리고 콘텐츠의 핵심이기도 하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본떠 말하자면, ‘나들’에 의한 ‘나들’을 위한 ‘나들’의 매거진을 표방하는 매체가 <나·들>이다.

 ‘나들’의 사용례를 찾다 보니 김선우 시인의 ‘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2011)가 검색된다. “‘나’를 읽을 때 ‘나들’이라고 자주 독해한다/ 1인칭 복수형이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나들’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읽는다.” 2010년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가 연 강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수강한 사람들끼리 만든 모임 이름이 ‘나들’이라는 깨알 같은 사실도 확인했다. 둘 다 맥락에서 <나·들>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우리는 ‘나들’을 시구에 쓰이는 표현이나 모임 이름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정서와 태도를 가진 이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삼기로 했다.

 ‘나들’은 누구인가? 언제부턴가 우리 주위를 공기처럼 떠다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수시로 눈에 띄지만 그만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흩어져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다. 그들의 존재는 특정한 사건이나 이슈가 있을 때 매우 낯설면서도 강력한 양식으로 표출된다. 2008년 촛불집회는 그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전형적 사건이다. 서울 광화문을 가득 메운 인파는 번듯한 깃발 아래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민하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매우 강한 힘을 모으지만, 금세 다시 흩어진다. 그러나 완전한 해체는 아니다. 일상의 소통과 모임은 온라인에서 수만 가지 모습으로 살아 꿈틀댄다.

 그들은 아직까지 규정된 적이 없다. 여전히 공백으로 남은 인격들이다. 크다는 것만 짐작할 뿐, 모집단을 설정할 수 없기에 규모를 산출할 수 없다. 그들은 인구통계학 바깥에서 서식한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호명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1980년대의 엄숙한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곳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을 뭐라고 설명할 건가. 그들은 젊은 층인가? 젊은 축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엄마 아빠와 아이들의 일가족 나들이도 자주 목격된다. 서울광장의 집회 현장에 나타났던 젊은 연인들은 얼마 뒤 같은 곳의 싸이 공연에서 몸을 흔든다. 아빠와 딸은 거실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대다 인상 비평을 나눈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보다 못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조직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다. 집단의 규범보다 개인의 가치판단이 앞선다. 물질적 안정 속에 소비의 주체로 성장한 세대는 더욱 그렇다. 정치적인 배경도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이미 여기 있는 것’으로 체화했기에 개인의 권리 의식이 강하다. 불편한 이유들도 있다. 성인이 된 그들을 위해 우리 사회는 자리를 남겨놓지 않았다. 자리가 없으니 조직이 없고, 조직이 없으니 더욱 개인화된다. 불안과 불만이 커진다. 이런 흐름에 기성세대도 하나둘 동승했고,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의 신화가 무너지면서부터였고, 부동산 신화가 흔들리면서 심화됐다. 그러나 그들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들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가닥으로 이어져 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다. 그들은 ‘나’의 복수다.

 최근 몇 년 새 치러진 선거 결과는 ‘나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새삼 되묻게 한다. 2010년 서울 지방선거는 야당이 압승했으나 시장 선거에서는 여당이 이겼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다시 야당이 이겼다. 그러나 그 기운은 오래가지 못하고, 올해 총선에서 다시 여당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대다수 언론과 정치 전문가들은 세대의 움직임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전형적인 ‘나들’의 현상이다. 그들은 정치적 변화를 결의하지 않았다. 진영논리에 무관심한 그들은 각자 반응하고 선택했을 뿐이다. 각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 정치 구호가 먹혀들 리 없다. 그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그물 위를 자유롭게 흘러다닌다.

 그래서 ‘나들’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으로 곧바로 수렴될 수 없다. ‘나’와 ‘들’은 고정되지 않은 채 서로 밀고 당긴다. <나·들> 제호에 가운뎃점을 찍은 것도 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나·들>이 더욱 주목하는 건 둘 사이 관계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이에 따라 ‘나들’이 무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나들’이 진영논리와 세대론을 넘어서는 이유이자 이 시대의 보통명사가 될 것으로 내다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도 ‘나들’이 아닌가?

안영춘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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