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03 15:43 수정 : 2013.04.03 15:43

안영춘 편집장
달빛이 교교하다. 그 달을 보며 탄식한다. 계절의 운행에 더 민감했더라면 이런 기획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억울함도 없지는 않다. 한 달 전, 386이 세웠다는 사교육 1위 업체가 새 학기를 맞아 ‘우정 파괴’ 광고를 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패착을 둘 만큼 둔감한 영혼은 아니다. 4월호는 한껏 화사하게 꾸며도 모자랄 판에 그만 ‘386 운동권과 사교육’을 기획하고 말았다.

나는 386세대의 민낯을 교육에서 발견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부동산에서 찾는다. 교육과 부동산이 계급 재생산 메커니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건 맞다. 그러나 둘의 위상은 같지 않다.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다. 강남의 집값은 교육열의 결과다. 나는 자식 교육을 위해 ‘비강남’의 집을 팔고 강남에서 세를 사는 이들도 여럿 보았다.

듣는 386은 억울할 수 있겠다. 맹자 엄마는 유구한 역사 속에 현전해온 보편적 인격이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치맛바람’은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때에도 세태어였다. 하지만 386은 교육에서 자신의 세대 정체성만큼이나 확연히 차별화된 행태를 보여왔다. 사교육 수요자로서 386은 성별 분업을 해소하고 ‘바짓바람’을 일으킨 최초 세대다. 그 시장을 밑동부터 흔들어 키워놓은 막강한 공급자도 그들 386이다.

특정 세대가 사교육의 최강 수요자이자 동시에 최강 공급자인 건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양쪽은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일 뿐, 386은 다른 어느 세대보다 교육이라는 범주에 강하게 몰입해 있다. 대안교육은 다른가. 사교육이 공교육 내부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지훈련이라면 대안교육에는 공교육의 경로를 멀리 돌아 다시 공교육 최상부에 우회 상장하려는 수가 엿보인다. 여기에서도 주류는 386이다.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왜 하필 ‘교육’인가. 어느 세대보다 20대의 고압선을 정치적으로 뜨겁게 통과한 386은 한때 진정성의 주체였다. 젊음을 헌신함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을 내면화한 엘리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 어느덧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에게 교육은 자식의 안정된 미래를 현재로 가불하려는 중산층의 보편적 욕망뿐 아니라 도덕적 알리바이(맹모는 얼마나 숭고한가)까지 동시에 제공한다.

<나·들>은 정색하고 덤비지 않으려고 했다. 비판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386을 개별자의 삶의 서사로 살피는 것이 그 세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접근방식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봄밤, 이렇게 되뇌는 나도 하는 수 없는 386이다. 모든 386이 똑같지 않다는 말을 붙이는 건 꼭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차이를 보는 눈이 더 나은 미래도 볼 수 있다.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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