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3:05 수정 : 2013.02.05 03:05

1. 날적이의 시대

대학 시절 학생회실에 가면 ‘날적이’가 있었다. 긴 회의탁자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날적이는 오늘날로 치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통의 네트워크 장치였다. 노트를 펼쳐 글을 읽어가면 대학생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누군가는 자신이 읽은 책의 구절을 써놓기도 하고, 누군가는 만화를 그리고, 또 누군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거의 강령에 가까운 장광설을 펼쳐놓기도 했다. 동감하는 구절을 발견하면 거기에 답신을 보충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도 오늘날 ‘도배’라고 흔히 말하는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있었다.

반면 나는 날적이에 뭔가 쓰는 일을 꺼렸다. 필적을 보면 누구 글인지 알기 십상인데, 나 자신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하는 일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것이 내밀한 것이면 내밀한 것일수록 더욱 그러해서, 날적이를 통해 타인의 생각을 관조하는 일은 즐겼어도 쓰지는 않았다. 날적이를 쓰는 사람은 동시에 날적이를 읽는 사람이기도 했다. 국문과 학생들이었으므로, 날적이에 써 있는 글은 청춘기 특유의 다소 과잉된 정념으로 충만했던 것 같다. 사랑도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그것이 사적인 기록이라 할지라도 실시간으로 대면하는 동료들이 기타를 치고, 타자기를 두드리고, 바둑을 두고, 대자보를 쓰는 공간에서의 글쓰기였던 만큼, 그것은 말하자면 학생들의 공적 소통의 장처럼 느껴졌다.

현재의 날적이가 있다면, 과거의 날적이도 있었다. 10년도 더 된 낡은 글씨들을 읽다보면 얼굴을 알 수 없는 선배들의 구체적인 고민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그 삐뚤삐뚤하고 곱고 부드러운 필체에서 글을 쓴 사람의 심적 상태나 성격을 유추하는 재미도 있었다. 날적이를 쓰는 공간은 또한 ‘만남의 약속’이 실현되는 장소였다. 거의 매일 날적이의 여백에는 오늘은 이모집에서, 또 내일은 전농골에서, 혹은 창의서점에서 몇 시에 보자는 등의 메모가 써 있었다. 메모는 대부분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밥과 술을 먹자는 제안이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명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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