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1 12:04 수정 : 2013.02.01 12:57

올겨울은 서둘러 왔다. 내 생체 달력에 표기된 혹한기는 늘 1월 중순 이후였다. 이번에는 달포는 당겨졌지 싶다. 덕분에 내 출퇴근용 자전거 ‘흑묘’(黑猫)도 일찍 겨울잠에 들었다. 정작 1월 중순을 넘어서자 몇 차례 비가 내렸다. 빗물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눈더미마저 씻어갔다. 잔뜩 움츠린 나뭇가지에도 붉은 기운이 희붐하게 움트는 듯했다. 내처 봄이 올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추워졌다. 1월 말 어느 휴일 밤 휑한 사무실에서 비니를 뒤집어쓴 채 이 글을 쓴다. “이건 꽃샘추위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까칠한 동료들이 돌직구를 날린다. “일 방해하지 말고 들어가 쉬시든가.” 봄은 유보됐다, 라고 나는 다시 멋대로 뇌까린다.

‘자연현상은 곧잘 내 마음을 은유한다.’ 써놓고 보니 제법 그럴싸한 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어땠기에 계절의 운행이 이토록 어지러운 걸까. 내 마음은 봄을 당기거나 유보시키기는커녕 날씨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빗댈 뿐 작용하지 못한다. 국어사전을 뒤져보니 은유(隱喩)에는 동사 ‘은유하다’가 아예 없다. 처음부터 식물성이었다. 그러니까 ‘자연현상은 내 마음의 은유다’라고 은유하는 수밖에 없다. 올겨울 내 마음은 삼한사온의 계통보다 들쑥날쑥했다. 마음과 날씨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점선을 그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끌어올 수는 없다. 내 마음에는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사적 관계 모두 영향을 미쳤다.

지면 사유화의 혐의를 덜기 위해, 난분분한 넋두리 끝에 한 자락 걸치고자 한다. 인과관계 중심의 인식론은 ‘근본’을 전제하기 십상이다. 분단을 한국 사회의 근본모순으로 파악하려 했던 태도도 한 예다. 많은 이들에게 지난 5년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명박 탓이었다. 그러나 ‘닥치고 정치’ 유의 정권 심판론은 미래 5년을 위한 선택에서 과반수를 끌어들이지 못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나의 표상으로 환원하는 태도가 위험한 것은 그 전제의 오류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적대적 양자 구도에서 배제되거나 짓이겨지는 존재들이 수적으로 오히려 다수인 구조를 낳을 개연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그들 중 다수는 적의 자양분이 된다.

<나·들> 2월호에는 각별히 무거운 기사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만들어놓고 보니 그렇다. 하지만 만든 이에게는 곳곳에 숨은 암시 장치가 엿보인다. 의도적으로 설치한 것은 아니다. 날씨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과관계가 없는 건 확실하다. 읽다보면 봄이 가까이 와 있을 것이다. 이번 호의 미덕을 애써 거기에서 찾고 싶다.

안영춘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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